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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무장의 농민군 최경칠, 손자 진옥
대상인물

최경칠(崔敬七)

1861~1946. 본명은 귀환(貴煥), 경칠은 자, 호는 월포(月浦). 무장에서 접주급 이상의 활동을 하고, 농민전쟁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

증언인물

최진옥(崔鎭鈺)




1933~ . 최경칠의 손자로 전북 고창에서 농업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갑오년에 서른네 살 됐어요.” 무장의 농민군 최경칠의 손자 최진옥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원래 이 동네[구수부락]에 살았습니다. 구암리 구수부락인데 그전부터 당산, 당산했습니다. 도로확장하면서, 원당산은 없어졌어요. 그 당산이 참 귀중한 당산인데, 문화재로 올라가기도 했는데. 그런 나무를 없앴지 않습니까? 90년도쯤 없앴어요. 그전에는 밥술이나 먹고 괜찮게 지냈어요. 저 어려서만 해도 그 때는 머슴이 있었거든요. 육이오 이후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파탄이 됐습니다.” 당시 최경칠의 집안은 밥술이나 떴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뚜렷한 부자는 아니었고 지낼 만했어요. 저희 아버님도 마을에서 군자소리를 들었습니다.” 부자(父子)가 마을에서 평판은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최진옥이 떠올리는 할아버지에 대한 행적은 그리 분명치 않다. “세부적인 것은 모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풍채는 아주 장골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이렇지만은, 구 척 이상 되고 장골이었어요.” 다만 전해 내려오는 모습만이 기억될 뿐이지만, 그런 모습에서 최경칠이 접주급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은 위임장도 있었거든요. 어디로 피신가셨는지도 잘 모릅니다. 분명히 그 양반의 것은 상자 두꺼운 걸로 해서 육모상자에 위임장이 있었거든요. 동학의 무슨 위임장이었는데, 내내 있었는데 육이오 날 때 없어져버렸어요. 제가 열세 살 때 작고하셨어요. 외아들을 두었지요. 제 형제는 둘인데 형님은 돌아가시고 지금은 저 혼자지요. 저는 애들이 많습니다. 육남 일녀입니다. 33년생이고.

그나마 집에 남아있던 동학접주(?)의 위임장마저도 한국전쟁 때 잃어버린 상태라 할아버지의 행적을 복구할 어떤 기록도 후손들에게는 없고, 다만 전해 내려온 말과 기억에 의존할 뿐이니 후손으로서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어떤 역할을 헌 것은 어떻게 들어서도 모르겄어요. 저도 아버님한티도 듣고 마을 어른들한티도 들었는데, 갑오동란 때 고역을 보시고 비합[법]생활도 하셨다고 그래요. 아버지께서 할아버지가 동학 때 굉장하신 양반이라는 얘기를 하셨어요. 때에 따라서는 말도 타고 다녔다고. 그러니까 그 당시로는 정부에 대한 저기라고 할까. 그래서 트생활도 하셨답니다. 그래서 그 양반 여동생, 저희 고모할머니지요. 그분이 밥을 날르느라 고생을 하시고 그랬다는 말씀을 저도 듣고, 마을 노인들도 알아요. 어떻게 활약을 하셨다는 것은 전연 알 수가 없지요.

최진옥의 말만 들어서는 농민전쟁 이후 숨어지냈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 후에도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는 말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으나, 미루어 살피건대 농민전쟁 이후에도 생존하여 나름대로의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다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인데, 아버지는 그렇게 활동적인 분이 아니었든지 특기할 만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저희 아버님도 열한 살에 결혼을 하셨대요. 그래가지고 일꾼 업혀다니면서 서당으로 이십일 년 다니셨다네요. 독자시고 지낼만치 지내니까. 아버님이 살으셨으면 지금 아흔세 살이십니다. 그런데 육십에 돌아가셨지요.

농민전쟁의 첫 기병지가 된 구수내 마을이 한국전쟁 때는 극심한 대립의 현장이기도 했다는 기이한 우연 속에 최경칠 가족의 삶은 최진옥 형의 유연한 처세술로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인공 때는 저희 마을이 아조[작살이 났다는 이야기]. 저희 형님이 육십에 작고하셨는데, 일정 이후로 부락일을 많이 보셨어요. 이장, 반장하다가. 인공 당시도 부락일을 보셨습니다. 부락 빨치산 대장을 했는데, 국군이 진주한 후로도 부락일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가정파탄이 있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사를 돌보지 않고, 술만 드셨어요. 그래서 가정이 파탄 됐어요. 간혹 육이오 때는 그런 것이 있었지만, 밤에는 인공이고 낮에는 대한이었는데, 우리 마을도 아주 유명했어요. 밤에는 부락 빨치산에서 난리를 치고 행세를 부리고. 그 마당에 저기한 재산 다 없어져버렸어요. 육이오 당시는 가족이 하나만 빨치산 했어도 못 살았는데.

어쩌면 농민전쟁의 고통 속에서 길러진 생활철학이 남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최진옥의 바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한 것이다. “효심이랄까, 저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이 누구나 있을 거라고 봅니다마는, 비석을 세우고 이름이라도 새길 수 있으면….” 올해 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이하여 주변에서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분의 비를 세운다 기념사업을 벌인다 하니 부쩍 할아버지의 비를 세우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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