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정백현(鄭伯賢)
1869~l920. 본관 진주. 본 이름은 근영, 백현은 자. 호는 진암(眞菴). 무장현 공음면 예전리 상례마을(지금의 고창군)에서 이백 석지기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음. 그는 어릴 적부터 글을 익혀 선비로 이름을 올렸으며 25세 때 송희옥과 함께 전봉준의 비서(秘書)로 글을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고 전함. 1894년 서울로 몸을 피해 살아났으며 타향에서 9년을 지내다가 고향으로 내려와 살았음. 저서로 시를 중심으로 모은 『진암견문록(眞菴見聞錄)』을 남겼음.
정병묵(鄭秉默)
1905~ . 정백현의 아들로 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둘밖에 찾을 수 없는 1세대.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한문 지식이 대단하며 집안내력을 소상하게 꿰고 있음. 아들 정남기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이사로 활동중.
이이화
다시피는 녹두꽃
정병묵은 아주 높은 나이인데도 가는 귀를 먹었으나 기억력과 근력이 아주 좋다. 그리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먼저 집안 내력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먼저 6대조 이야기부터 꺼낸다.
세상일은 그 양반[정백현]이 통 말씀을 않고 전사,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집이 어떤 집이다, 느그 할머니는 어떻고, 느그 고조한아씨는 뉘기뉘기고 그런 역사는 모두 말씀하셨어, 그래서 팔대 이하로는 모두 내가 비를 세웠어. 그 양반한테 사실을 들어서. 우리 육대조께서 초취(初娶)에 아들이 없이 무죽하시고 나중에 재취를 가셨는디, 기맥힌 집으로 재취장가를 갔네. 그 양반이 홀로 계시고 심심허신게 매를 가지고 꿩사냥을 갔네. 건동이라고 이 근처인데, 건동 대밭이 좋아. 매가 꿩을 쫓아 쫓은게 이런 두 칸 토담집 뒷문을 열어놓고 베를 철딱철딱 짜는 방으로 쏙 들어가 방 안에 가만히 은신을 하고 있었어. 아 멀[말]만한 큰애기가 꿩이 들어간게 꿩을 감췄어. 그래서 저 꿩을 어쩌는고 하고 보니까, 한 반 시간 동안 베짜는 소리가 탈탈탈탈 거리더니 나중에는 앞문을 툭 열고 사방을 둘러보며 포수가 갔나 어쨌나 허더래요. 꿩을 치마로 보듬고 나와, 아나 너 세상보고 잘 살아라 하고 놔주니, 이 양반이 이것 보고서 중매쟁이를 곧 보냈어. 여기서 오 리 정도 되니까. 그런데 중매쟁이를 보냈더니 처녀 아버지, 어머니가 밥을 안먹고 힘알을 혀. 그 양반 장개온다고 하니께, 어쩔라냐고. 아, 이것이 가서 어떻게 뒤를 이어. 식음을 전폐하고서. 큰애기가 아, 어째서 그러시요 하니까, 일이 이런데 ‘니가 가서 감당하겠냐.’ ‘그만 하시고 허락 하시요. 내가 가서 능히 헐랍니다’ 말했대. 그래 양반이 오셨어. 우리가 모다 그분 손일세. 그 양반이 아들 삼형제를 낳았는데 민자 찬자 우리 오대조께서 무장 향교에 들어가서 건동 김씨한테 관하나 내주라고 말해. 양반 맨들자는 것이지, 그래서 관 받고. 그런 얘기를 비문에 다 내가 새겼어. 그전 세상에는 혼인도 다 서로 가려서 허는디. 우리가 건동 김씨네 손이라고. 시집을 잘 와 놓은게 양반이 되고. 같은 김씨라도 건동 김씨라면 양반 김씨라고 대접 받고 그랬당께.
그의 손으로 6대조 조상의 비를 모두 세운 것을 무척 대견해했다. 철저하게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5대조 할머니부터 자손이 번성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또 재산이 불어난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고 있다.
막내아들이 만석꾼 집에 양자를 갔어. 그때는 일가간이라도 양자를 빌러 댕겼어. 일가 내외분이 밤낮 와서 아들 하나만 주십시요 해도 허락을 안했어. 하루는 삼형제가 주르르 허니 서당에 갔다가 점심을 먹을라나 해서 오니 양자 빌러 온 내외분이 뜰 밑에서 하나 주십시요 하면서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어 막둥이 아들이 오다가 뜰 밑에 그러고 있으니까 성거치를 갖다가 딱 데려다와. 그이 아들이 양자 갔당게. 어떻게 부잔지, 양자 가서 만석을 받았네그려. 만석을 가지고 생가집 한아버지 전부 다 상석을 했네. 생가집에다 위토(位土) 서른일곱 마지기를 줬고. 전부 그 양반이 다 했당게. 그래서 우리집이 그렇게 해서 살아나왔어. 그런데 지금은 터도 없어. 의병난리 때 다 타버렸어.
5대조부터 부자가 되었다는 흥미 있는 한 가족사이다. 그의 증조부, 조부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이제는 그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순서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내가 자세히는 모르는데. 내가 열다섯 살에 그 양반이 돌아가셨어, 그러니 뭣을 알겄는가. 내가 어리고 그런게 뭔 말도 안허시고 또 세상이 시끄러워져서 동학군이라고 허면 전부 잡아서 가문을 조처헌다고 헌게 이 양반이 딱 거절해 버리고서는 이 양반은 통 뭔 말을 안하셔. 그런 소문은 들었지.
그가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서 나이 오십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다.
무장 공음면 군율에 항상 일가들이 만나서 나로 치면 방조상의 시사를 지내, 시사가 삼월 초열흘날이여. 무장이 여기서 한 십 리밖에 안된게. 한 번 참석허라고 해서 내가 한 오십 살 넘어서 참여했단 말이여. 전근호 씨라고 있드만. 나보다 한 십여 년을 더 자셨어. 말하자면 노인이여. 그때 전근호씨가 우리 방조 산소의 산지기를 혀. 그분하고 저녁에 그러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가 아산 오정동에 살고 선친 자호를 말하면서 백자 현자 그 양반하고 부자지간이라고 말하자 깜짝 반가워하며 그 역사를 얘기해요. 그런데 그분네도 물론 잘 알 만해서 한 열댓 살 먹었을라는가 해서 그 양반 하는 것을 봤다고[아마 정백현과 상종한 것을 말하는 듯]. 그런데 팔도 말하자면 사발통문이라는 걸 전부 그 양반이 썼데. 그런게 전장군이 그렇게 무식이사 할라는가마는 보돗이 기성명허고 뭣은 못하는 분이더. 그러니까 이 양반이 비서가 되셨지. 전부 일임을 허시고 해서 꼭 이 양반이 거시기 허는디. 나중에 갑오년에 경군들이 내려와서 야단을 때리고 일본놈들이 난리치는 통에 문서 갖다가 싹 마당에다 불처질러버리고 아무 흔적이 없지.
그리고 전봉준과 정백현과의 면담에 대해서는 이렇게 전한다.
전봉준이가 중바닥 사람이라도 원체 사람이 물망차고 그런게 전봉준이 말을 듣고 참 친했대요. 전근호가 그 얘기를 허더란게. 그 양반이 편한 세상 같으면 전봉준이가 그 앞에서 신장도 못한다고. 그런데 원래 사람이 대가 차고 사상이 깊고 한게 전봉준이를 친해가지고 그렇게 되얏다고. 원래 전봉준이가 물망이 찬 선생이여.
애써 전봉준보다 신분이 높음을 말하고 있으나 그 당시 나이가 전봉준은 장년, 정백현은 청년임을 감안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글을 쓴 일 이외에 정백현의 당시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곧 “이때에 송문수, 강경중, 정백현, 송경찬, 송진호는 무장에서 기포(起包)했다”(「천도교 교회사 초고」에 나옴)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의 ‘이때’는 2차 봉기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보다도 그는 아버지의 어릴적 이야기와 사람됨에 대해 더욱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전에는 부자였어. 한 이백여 석 받으셨어. 암 양반이지, 벼슬을 저렇게 허시고 그전에도 우리집이 훌륭한 집이여. 같은 정가라도 우리집이라고 하면 그전부터 알아줬지. 폐일언허고 그 양반 장지가 여그 자리바우뜸이라고 거기 뒤인디, 노인들이 내 성묘 다니면 항상 그랬어. 열두 골 관장이 다 뒷짐지셨대. 태인 모천서 원에 제관을 가셨는디, 무장서도 저런 인물이 있는가 그러더래. 그 양반이 대추를 좋아하셔서 대추를 양도포 소매에 닷 되씩 꿴다고 해. 큰 인물이라 대추를 좋아했어.
어릴 적부터 글 잘하는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거나 얼굴 잘 생기고 체격이 당당하고 언변이 좋다거나 산송(山訟)을 잘 처리했다거나 원들도 쩔쩔 맸다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인심이 좋아 곡식을 꾸어주면 받을 줄을 몰라 “나물양반 새꺼리 주듯이 한다”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나물양반은 정백현의 처가가 나물이어서 붙여진 별호이다. 이런 이야기는 연대기로서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의 일화를 뒤섞어놓은 듯하다. 아무튼 정백현은 농민전쟁이 끝난 뒤 몸을 피했다. 정백현은 처음 전봉준이 태어난 당촌마을 앞에 있는 신촌마을로 몸을 숨겼다. 신촌에는 친구 봉정범이 있었는데 그 집 골방에 약 3개월 동안 숨어 지내다가 서울로 튀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서울로 가셔버렸어. 일지를 보면 두 번째 서울로 가신 거여. 첫 번째는 과거보러 가시고, 나중에는 피난차 가셨고. 견문록이라고 서울 가서 쓰신 책이 있는데, 그 책을 보면 재교우 한양[再交遇漢陽]이라고 나와 있어. 두 번째 한양을 가셔서는, 일방구우[日訪舊友]라고 날마다 친구를 찾았어. 판서 대감 모두 찾아다니며 풍을 지어 시를 지어가지고, 좋은 술에다 안주를 해서 친구를 만나고. 서울 가셔서 꼭 사년인가 오년인가를 변성명을 대고 살어. 서울 재상가들이 원체 글을 잘하신게 모두 탄복을 하고. 일지에 다 나온다니께.
정백현은 연줄을 찾아 서울에서 떠돌이생활을 했고 글 잘하는 덕분으로 명사들과 어울렸다. 정백현 자신은 이때의 심정을 “오래 한 모퉁이에 머물면서 고향 소식을 못 들은 지 지금 이년이다. 아아, 가사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심사가 정해지지 않고 가슴이 깡그리 찢어진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집에 돌아가 죽었든 살았든 소식이라도 들으면 안심이 될 듯하다”(『진암견문록』)고 쓰고 있다. 이 말처럼 그의 집에는 큰 비극이 연출되었다.
그통에 우리 아버지가 피신을 해버렸단 말이야. 그때 우리 조부님도 계시고 증조부님도 계셨어. 우리 증조부님은 딴 데 가 계셨고 조부님도 화를 당하셨당께. 고부 수성군에게 잡혀갔는데 이놈들이 모진 고문을 한 탓에 돌아가셨어. 그런데 선친께서는 피화하시느라고 없으신게 내 자친께서 전부 반장[反葬]해다가 장사지내고 그랬지. 우리 조부님이 기유생[1849년]이라 그때 마흔 몇 살이었지.
연좌법에 걸려 정백현의 아버지가 죽었고 큰아들은 일곱 살, 작은 아들은 두 살이어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백현의 서울생활은 화려했다.
정중군이라고 가까운 집안 일가가 되는데 그 양반에게는 아저씨지. 그런데 그 양반이 무오년에 작고하신 고종 황제하고 동갑이여, 임자생[1852년]. 동갑이라 놔서 고종 황제하고 참 절친했단 말이여. 그 양반이 여기 치자원 밑에서 살았는데 원주중군에 진주영장을 지내셨다니께. 무과로. 이 양반이 서로 일가간이고 하니께 알아줬어. 그래서 고종 황제가 쉰한 살에, 쉰한 살이라고 하면 환갑이 한 십년 안 남았는가? 쉰하나 임인년[1902년]에 고종 황제가 전라도 순천에 와서 성수전을 지어줬어. 예순을 바라본다 해서 망육전[望六殿]이라 했지 정중군을 보고 아, 저기 가서 쪼개 일을 보고 성조유사[聖造有司]를 하라고 한게. 아 내가 무과로 원주중군에 진주영장을 지냈는데 헐 수가 없다고. 내 족질이 시골 무장서 고창 와서 있은게 정합시다. 아 그러면 입시하라고 내 선친이 그 말 듣고 조복을 입고 고종황제한테 갔어. 인사드리고 수천 송광사 성수전 도유사[都有司]를 맡으셨단게. 맡으셔서 그 집을 지으셨지.
그리하여 순천 송광사에 고종의 육순을 기리는 성수전(聖壽殿)을 훌륭히 지어냈다. 여기의 ‘도유사’라는 직책은 『진암견문록』에 의하면 별유사가 맞다. 그 외에 연대 같은 것은 모두 사실과 들어맞는다. 이 공으로 정백현은 두 가지 은덕을 입는다.
그래서 그 집을 다 짓고 낙성식을 하는디 시방 저기 교지가 있구만. 우리 증조부님을 정삼품 통정대부 정 종 자 현, 또 종이품 가선대부라. 이렇게 해서 교지를 받으셨어. 그 양반에게는 조부지, 내게는 증조부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응게 못허시고. 시방 가선대부라고 하면 참판집이여. 그래가지고 광무 6년[1902년] 섣달에 났구만. 그리고서 중들이 그 양반게로 바리때를 해서 희사를 하고 중들이 전부 그 양반 산판을 하고 해서 거기다 초하루 보름으로 목탁치고 축수를 드리고 그러는 것을 이 근방에서 누군가 절 구경 갔다가 봤어. 그래서 나한테 그 얘기를 하더란게. 자네 어르신네 위해 중들이 초하루 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고. 아 인공 때 그 집을 불을 안 질러버렸는가? 내가 그 뒤에 우리 계에서 구경가자고 해서 순천 송광사 성수전을 가봤어. 한디 타질러버리고 없어. 다 불타버리고. 새로 지었어도 그전 것에다 댈 건가?
지금도 그 교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어 정백현에게는 해주 관찰부 주사가 주어졌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것은 1903년경으로 보인다. 9년 동안 고향을 떠나 살았던 것이다. 나라가 더욱 어지러워지자 표연히 서울을 떠났다 한다. 그는 집을 오정동으로 옮기고 시사는 일체 입에 올리지 않고 살았다 하며 고종이 죽자, 집 뒤 산봉당에 망곡단(望哭壇)을 만들어놓고 아침마다 호곡하였다 한다. 정병묵은 조상현양에 열중한 것을 앞에서도 말했는데 정백현의 비를 세울 적의 이런 일화도 덧붙인다.
그 양반 인자 역사비가 있네. 내가 세웠지. 동학 얘기를 헌다한게, 어느 누가 아 허지마소. 요샌게 동학 동학 허지 그전에는 상놈들이 동학했지. 그래서 뺏당게. 그런데 묘비에다가는 그럴 수가 없응게 잠깐 혈기방장할 때 했다가 참기를 곡 같이 참고 서울로 가셨다고 썼지. 그런 사실이 있어.
그러나 정병묵은 이런 사실들이 역사의 잘못임도 강조한다. 그는 “당초 봉건주의 사상이 몹쓸 사상이거든. 내 집안에서 적서 구분해가지고 서자라면 상놈 모두 맨들어버리고 그리고 상놈이 근본 원칙이 상놈이간디. 한아씨가 삼대 무현관이면 상놈이여? 삼대 벼슬을 않고 무식하고 제 한애비 이름자도 모르고 그러면 상놈이지. 본전이 상놈이 아닐세. 그런게 이놈의 봉건주의 사상이 나뻐. 요새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여. 재인 백정놈이 없고”라고 말한다. 그 후 그의 관심은 계속 이어진다.
서울서 나중년에 모두 책자를 『동학혁명사』라고 안 박았는가. 국사편찬위원장이 누구냐면, 해리 안산 사는 이현종이라고, 내 재종매의 손자여. 현종이라고 갸가 정백자현이라는 양반이 문서는 없고, 사료도 없고 비서라고만 써 놓았다고. 현종이는 지금 자기 외간 줄을 모르지 그 양반이 나중에 황해도 해주 관찰부 주사로 행직[行職]을 한 일년 하셨어. 그리고는 바로 집으로 오셨단 말이야. 그래 놓은게 황해도 해주 관찰부 주사한 중은 어찌 알았는가 황해도로 자꾸 관심을 쏟아. 그래봐야 뭔 소용이 있간디. 그러다 나중에 우리 남기를 만났어. 남기는 말하자면 내 재종매의 손잔게 잘 알 것 아닌가. 남기가 우리 조부님이라고 허니께 아 그러냐고. 그러다가 현종이가 안 죽어 버렸는가? 현종이가 죽은 지 한 십오 년 정도 된당가? 그래가지고서 인자 끊어져버렸어. 간간이 책에 보면 전봉준 전장군 비서라고만 해놨지. 아무 내력이 없어. 무장이 동학혁명가의 본거지 아닌가? 그러다가 고창문화원장이 나한테도 늘 와서 알아보고 공음면 가서 구정리 가서 조 사하고 또 이이화씨라고 와서 모두 그렇게 해서 알려졌어.
정병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형님이 남의 사우(祠宇) 만든다고 살림을 날리고 일찍 죽었다고 한다. 그런 탓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털어놓는다.
농사 지었지. 아들 칠형제. 지금 아내는 우리 남기 세 살 먹어서 재취로 스무 살 먹어 들어와서 시방 일흔한 살이지. 처음에는 집도 없어서 넘의 집에서 살고, 살림이 아무것도 없었지. 빚더미에 전답 다 넘어가버리고 큰 아들이 빚보증 서서 살림 날리고, 논마지기나 남았지. 내가 자수성가 해서, 그래도 선산일을 해야 한다고 쪼르르르 하니 여섯 개를 세웠어. 선산일을 하고 애들 가르치고 내 손자가 육십여 명이여. 손자 하나가 작년에 행정고시 합격해서 잔치를 벌였네.
끝으로 100주년이 되어 아버지의 평가가 새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흐뭇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