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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차 기병 때부터 참가한 고창의 농민군 박헌, 손자 용마
대상인물

박헌

고창군 상하면 출신의 농민군으로서 1차 기병 때부터 참가한 것으로 보이며, 전쟁이 끝날 무렵 처갓집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되어 1895년 2월 10일 무장에서 처형됨.

증언인물

박용마



74세. 일제 때 북해도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숱한 고생 끝에 지금은 고창에서 농업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패하고 관군의 수색전이 펼쳐지자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농민군들은 자신의 연고지에 몸을 숨겼다. 박헌도 급한 대로 처가를 찾아 몸을 숨기고 사태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들이닥친 수색군의 눈길을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박헌은 상투를 잡혀 끌려갔고 무장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본래 고향은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도리동이고, 거기서 사시다가 할아버지의 처가인 이곳 전라남도 영광군 흥농읍 월암리로 옮기셨어요. 할아버지가 동학에 다니시고 피난다니시다가 월암리로 피해오셨어. 처남이 고향 이런 바위 우에다 피난을 시키셨어. 그런디 일본사람들이 말타고 들어와갖고 한아버지를 찾어. 없다고 해서 가는데 최준서(할아버지의 처남) 씨가 어떻게 말을 잘못했는가 그 양반이 약간 부족한 양반이여. 그래서 가는데 마을 입구에서 그때도 스파이가 있었던가벼. 무조건 방으로 들어와서 상투 꼭대기를 잡고 할아버지를 잡어갔어. 할머니가 어떠코 무장읍에서 이십 리 길을 모셔오셔서 초상을 치렀어. 지삿날은 2월 초아흐레 날이여.

박헌의 부인은 20리 길이나 되는 무장에서 남편의 시신을 모셔와 상하면 하장 4구에 묘소를 마련하고 2월 초아흐레를 제사날로 잡았다. 당시 박헌이 누구의 부대에 배속되었고 어느 전투에 참가하였는지 궁금한데, 안타깝게도 박용마 옹의 증언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고창군 상하면 출신 농민군이라면 3월 무장기포 때부터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며, 전봉준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1월 말 농민군이 해산되자 영광의 처가에 몸을 숨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894년 1월 고부봉기가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에 의해 해산하게 되자 전봉준과 그의 직속 간부들은 무장으로 내려갔다. 무장에 내려온 전봉준은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설득시켜 마침내 3월 20일 농민군을 모으고 진격의 나팔을 불었다. 이른바 무장기포다. 이 무장기포의 집결지가 고창군 공음면 구수내였다. 구수내는 박헌이 살던 상하면 도리동과는 엎드리면 코닿을 거리. 구수내에서 기병한 후 농민군은 무장을 들이치고 고창을 거쳐 고부까지 다시 올라갔다. 이때 전봉준은 본대를 고창에 잠시 머무르게 하고 선발대를 뽑아 줄포를 거쳐 고부에 들어가게 하였고, 자신은 선발대를 뒤따라 4천여 명의 본대를 이끌고 고부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고부를 점령하고 백산에 본진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진용을 갖추어 전국적인 농민전쟁의 횃불이 밝혀졌던 것이다. 이때 박헌도 구수내에서부터 농민군의 대열에 참가하여 백산에까지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박헌은 농민전쟁의 발상지에서 처음부터 참가한 농민군인 셈이다. 그런데 박헌은 어떤 동기에서 농민전쟁에 참가하였을까. 흔히들 농민전쟁에 참가했으면 동학교도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농민전쟁에 참가한 것에는 여러가지 동기가 있었다.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당시 정치·사회 경제에 대한 비판이 하나의 동기가 된 것도 있고, 마을 전체나 집안의 참여가 동기가 된 것도 있다. 또는 유력자의 권유가 작용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박용마 옹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동학에 다니시고 피난다니시다가 월암리로 피해오셨어”하는 정도에 그쳤다. 마침 무장기포에 큰 역할을 한 고순택의 후손으로 인근에 사는 고재호 옹이 옆에 있다가 거든다.

동학을 믿었으니까 그짓거리가 났겄죠. 숨어있다가 잡혀 가지고 취조받고 공판받어서 사형을 받었으니까 사형내역이 무장현에 가서 있을 터인디 그것을 찾어낼 수가 있느냐 말이지…. 김정수 씨 할아버지하고 이 양반 할아버지허고는 상하서 사실 때 한 들 사이여. 정상도란 사람 할아버지도 그때 죽고 거그는 선운사에서 등잔불 써놓고 숨었다가 잽혀가지고 죽고. 긍게 겁나게 숫자가 많은디 동학에 조사헌다고 어쩌고허먼 무슨 생각들을 헌지 돈 뜯어갈라고 수작부리고 댕긴다는 소리가 나온다고 쉬쉬해 중간까지도.

단편적인 기록이나마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동학을 믿었던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런데 구한말 유생 황현(黃玹)이 쓴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열흘간 수만 명이 모였는데 동학(東學)과 난민(亂民)이 합한 것은 여기서부터”라고 하여 무장기포에서 동학과 난민(일반 농민)이 결합 하였다고 했으니 박헌은 동학교도일 수도 있고, 난민 쪽의 비동학교도일 수도 있다. 우리 역사가 좀더 엄밀해지고 후손들의 관심이 높아진다면 어렵지 않게 가려질 이런 문제들이 그냥 묻혀지고 쉽게 추정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할아버지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박옹의 집안은 갑자기 기울었다. 여느 농민군 집안이 걸었던 형극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조실부모하고 별 것이 없었죠. 요새사 산을 개간해서 그렇지, 그때 산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벌어먹을 수가 없었죠. 우리 아버지가 고생을 많이 했어, 배운 것도 없고, 할아버지가 동학에 나다니시고 껄렁껄렁 하시니 할머니가 어떻게 해, 도리가 없제. 아버지는 내가 19살 때 돌아가셨어. 해방 전에 내가 일본에 간 지 4년 만엔가 돌아가셨으니까.

일제 식민지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무렵, 박용마 옹은 징용에 나가고 그 사이 아버지는 큰 빚을 남기고 돌아가고 말았다. 북해도 탄광에서 돌아온 박옹에게 닥친 현실은….

북해도 이꾸센베쓰 탄광에서 소화 17년도(1942년)에 갔는디. 어머니 돌아가시고 헐 것도 없으니까 가버렸지. 돌아오니까 아버지도 없고 조실부모했지. 우리 아버지가 산을 잽혀서 물도 못하고 돌아가셨지. 그래 내가 일본에서 와서 물었제. 그땟 돈 3천 원인가 갖고 와갖고, 아버지가 빚진놈 다 갚고 집도 없꼬…

그렇게 해서 빚 갚느라 바쁘게 사는 가운데 한국전쟁이 터졌고, 살던 동네는 빨치산이 출몰한다고 국군이 불태워버려 살곳마저 잃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할아버지가 숨어있던 곳이기도 했던 진외가댁이 있던 영광군 흥농읍 월암리. 그때의 사정을 손자 박용마는 이렇게 전한다.

6·25후에 왔지. 도리동 산 밑에 산께 빨치산 많이 산다고 해갖고 국군들이 전부 불질러부니 집이 없었어. 집이 없은께 진외가댁 양반들이 해리장에 갔다오다가 나한테 들러 가지고 우리가 여기 방이 있으니 내려온나 하는 그 주문에 왔지라.

그러나 이제는 조금 허리를 펴도 될 만큼 살림을 장만하였다. 기나긴 세월 저쪽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 그래도 벅찬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옆의 고재호 옹이 또 한마디 거든다.

지금 산장, 이 양반의 그 뜰 5천 평으로 그전에 팔아먹고도 그놈을 개간허고 선산을 거시기 했다고 허먼 아조 없는 살림은 아니지. 한 스물닷 마지기 될까? 아조 가난한 살림이 아니라고.

박용마·고재호 옹을 비롯한 100년 전 사건으로 맺어진 이 지역 출신 농민군 후손들은 지금도 서로 왕래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들의 이런저런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어가는 사이 오후의 해는 서산을 향해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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