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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초토영에 자수한 한의사 출신의 배환정, 증손 인수
대상인물

배환정(裵煥廷)

1864~1922. 본관은 달성. 자는 상삼(相三), 호는 남계(南溪). 한의사. 무장의 농민군 접주로 활약. 영광에서 체포되었으나 집안 배경을 이용해 풀려남. 1922년 사망.

증언인물

배인수(裵麟洙)




1923~ . 전북 고창에서 태어남. 서울 법대 졸. 도청에서 근무, 면장 등을 지냄.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부회장.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배인수는 농민군 후손으로는 보기드문 학력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도 차분한데 “살던 곳은 용수리고, 그전부터 오래 살았지요.”라고 입을 연 배인수는 가볍게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큰댁에서 분가를 했지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괜찮게 잘 살았다고 그러죠. 증조께서는 한약방을 하셨어요. 빈한한 환자에게는 약도 무료로 제공했고, 노부모를 모시는 환자에게는 반액으로 봉사를 했어요. 그래서 인근에서 인심을 많이 얻으신 분이었다고 하지요.” 주변에 인심을 얻은 것이 농민군에 가담하게 된 동기라는 뜻인데….

동학농민혁명이 발발이 되자, 동학교도에 신봉하신 것보다도 주위의 추대로 접주가 되었어요. 그래가지고 가담하게 되었어요. 벼슬은 참봉을 하셨지요. 그것을 마다고 하셨는디 한번 봉해지니까 그냥.

일종의 추대 형식으로 농민군에 가담했다고 강조하지만, 배환정의 속마음은 확인할 길이 없으나, 한의사인 그가 농민군 쪽에서는 절실히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을 것이다. 농민전쟁의 첫 기병지가 무장 공음면 구수리라는 것은 이제 다 알려져 있는데, 기병에 필요한 준비를 어떻게 하였는지 궁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 조부께서 당시 열다섯 살 때 당신 아버지, 배환정 그분을 따라서 집에서 십오 리 떨어진 구수리에 와가지고 저녁에 대를 베어다가 진을 치고 밤에 잠들 안 자고 불 피워놓고 대창 깎고 준비를 하시던 모습을 보셨다고. 그 얘기를 우리들 할아버지한테 들었지요.

결전의 그날을 기다리며 죽창을 밤새워 깎고 다듬었다는 이야기다. 구수리에서 대나무 깎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귀중한 증언이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손화중 접주하고 아주 친했다고 그래요. 손화중 접주가 아마 연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그서 모여서 전봉준 장군, 손화중 장군 다 함께 출발을 하셨다고.

이 증언을 통해 미루어보면 배정환은 지도급 인사에 속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배환정의 행적은 ‘전주함락한 후에 돌아왔다가 나주성을 공격할 때 참가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배환정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4월 7일 황토재 전투에도,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도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농민군이 4월 27일 전주성에 들어갔다가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과 수차례의 접전 끝에 전주화약을 맺고 5월 7일 전주성을 내주고 퇴각할 때 배환정은 고향 쪽에 잠깐 왔다가 나주성을 공격하는 최경선 부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나주성의 공격은 나주 대접주 오권선과 합세한 최경선이 7월 1일 농민군을 이끌고 노안면 금안동과 금성산 일대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5일 나주성의 서문을 공격한 싸움을 말하는데, 이때 배환정이 농민군 대열에 끼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가을 9월에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가를 해가지고 패해서 집으로 와서 숨었지요. 숨어있다가 체포령이 내리자 잠적했지요. 그 마을 근방에서 옆동네로 잠적했는데, 영광서 말하자면 큰댁 조카되는 참봉 배인기를 잡아갔어. 그러니까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지. 집안 회의를 해가지고 어떻게든지 풀려나게 할 테니까 자수하라 해서 우리 증조께서 영광옥에 들어가 죄인은 내가 긴데 왜 무고한 우리 조카[장손]를 잡아갔느냐? 석방해라 해서 풀려났고 배환정 증조께서 대신 옥에 들어간 뒤에는 중앙 송판서[송세헌 판서]하고 연락이 돼가지고, 초토사 홍계훈 대장을 통해 돈 이백 냥 내고 풀려났어요. 요새로 말하면 금보석이지요. 왜냐하면 송세헌 판서 그 분이 송시열 집안 영광 군수를 허셨는데 그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 치상을 우리 집안에서 해서 서울까장 반장을 해갔어요. 그렇게 해서 송판서 집안하고 우리 집하고 연결이 됐지.

공주 우금치 전투(11월 9일)에 참여한 역전의 용사답게 조카의 누명을 벗기려 영광관아에 자진출두하여 오랏줄을 받았으나 그 후 200냥을 내고 풀려났다는 대목은 소설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홍계훈을 통해 풀려났다는 부분은 약간 의심이 가는데, 혹시 좌선봉장 이규태나 우선봉장 이두황의 힘을 빌린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홍계훈은 개화정권이 들어선 뒤 밀려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래서 우리 증조부는 영광에서 풀려난 뒤에 변산으로 입산했지요. 피신한 거지. 한 오륙 년 계셨을 거예요. [영광에] 자수헌 때가 그해[갑오년] 십일이월쯤 됐어요. 피신하는 동안에 우리집 살림살이는 쑥대밭이 돼버렸고. 집에 와서 살림살이 다 가져가고. 가족들은 그 당시에는 피신 갔다가 끝난 뒤에 돌아왔지요” 일반적으로 후손들이 피신한 마을에 들어온 관군은 마을을 불태워버리거나 재산을 깡그리 몰수하여 떠났다. 그밖에 주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가져간 예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예나 지금이나 인심의 향방은 비슷한 모양이다.

증조부의 아들인 할아버지는 서당 선생님을 하셨지, 옛날에는 동몽교관이지. 그래도 안되니까 우리 부친께서 서당을 다니다 살림을 시작해서 열심히 일해 가지고 살림을 복구했지. 그리고 나중에 다 조용히 되자 다시 약방을 하셨다고 해요.

한약방을 다시 열 수 있었다는 것은 다른 후손에 비해서는 커다란 혜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하여 농민군 후손으로서 식민지시기에 아주 드물게 천석꾼지기가 되었다 하니 엄청난 속도로 재산을 증식하고 또 증식하였다. 그리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고 자란 배인수는 다른 후손에 비해 평탄한 삶을 살았다.

일정 때야 [농민전쟁 관계로] 핍박받고 그런 거는 없었어요. 부친께서 열심히 하셔가지고 왜정 때 한 천 석 가까이 받게 되었어요. 농사지은 것이 수백 두락 되었고 외작[선작]받은 것이 한 오백 두락 되어서 합치면 천 석 정도 되었다고 그래요.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성장을 했고, 제대로 교육도 받았지요. 고창중학교 나와서 서울대 법대를 나왔어요[1948년도]. 졸업해서 1950년까지 남원농고에서 교편을 잡고 51년부터 부친께서 병환에 계셔서 내가 병간호 겸해서 있다가 55년도에 부친께서 별세하시자, 가사 정리하고 집안을 돌봤지요. 농사를 많이 짓고 하다보니까 61년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면장을 하게 됐지요. 한 십년 했습니다. 그러다 59년도에 도청공무원으로 근무했지요. 그런 정도입니다. 자식은 아들 넷, 딸 둘.

이런 유족한 삶이 사람 좋았다는 증조부의 음덕에서일까.

풍채 좋으시고, 수염을 길러서 누구든지 보면은 동인지기(動人之氣),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풍채라고 했지요. 그분한테는 사람을 따르게 하는 기질이 있었다고 그래. 우리 집안에서는 약방 할아버지라고 통하는디 약방 할아버지라고 하면 근동에서 나쁘다는 사람이 없었다고. 그래서 나도 그 양반 존경하는 의미에서 기념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년 가을부터 반 년 동안 뛰고 있습니다.

기념사업에 참가하고 있다는 말은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업회 일을 하다보니 기억의 저편에 묻혔던 하나의 사실이 문득 떠올라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 있단다. “동학혁명군이 일단 패하고 대세가 바뀌었을 적에 우리 접주, 제복이랄까 군복이랄까, 칼도 있었다던데 모두 땅에 묻었다고 할머니한테 들었어요.” 지금 찾는다한들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까만 찾을 수 있다면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기념사업회에 의욕을 보이고 있는 배인수는 농민전쟁 100주년을 새로운 계기로 삼아 무언가 뜻깊은 일들을 추진하려고 한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동학후예로서 긍지를 갖고 현창사업에 같이 해야 쓰것다 생각합니다.” 뜻이 있는데 길이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올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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