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무장기포의 주춧돌 문덕중, 손자 노식
대상인물

문덕중(文德中)

1856~ ?. 본관은 남평. 전간재의 문하생. 무장의 농민군 접주로 활동하다가 1894년 12월 27일 체포(잡혀간 날 제사를 지냄)되어 포살당한 것으로 추정.

증언인물

문노식(文魯植)




1917~ . 일명 동찬(東燦). 문덕중의 손자. 목수로 전국을 다님.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문노식 노인의 손을 보면 단단한 굳은 살이 그동안의 모진 풍상을 느끼게 하는데, 여느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나이도 잊고 금세 얼굴이 환해지며 활기를 띤다. 문덕중의 집안은 그래도 동리에서 꽤 가진 축에 속했다. “어려서 우리 종조할아버지한테 그 말을 들었는데, 갑오년 동학 접주를 하셨다고 부자여, 논이 오백 두락 산이 한 스무 정보가 넘었드래요.” 그런데 농민전쟁이 끝나고 피신해 있는 동안 그 많던 전답이 모두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디 그거 다 뺏겨버렸어요. 그때가 무장면이 있을 때요. 공음면은 없고 우리 할아버지가 잽혀간게 삼십 호가 다 부잔디 싹 충청도로 피난가서 삼년 만에 온게 암 것도 없어. 그래서 여기와서 품팔아 먹고 살았어. 시신을 못 찾았소. 어쩔 것이요. 일본놈들이 문가들은 싹 잡어 죽인다고 하는데. 그때 우리 아버지는 두 살 되셨고 작은아버지는 충청도서 나셨다니까, 그 일로 인해서 그 동네가 파산되었습니다. 재산도 빼앗기고, 사당도 없어지고 논도 싹 가져가버리고. 홍농산도 갈미봉도 우리 한아씨 거였는데, 다 가져가버렸다요. 그때 삼년 만에 오셨다 하더라도 종절에 땅덩어리는 있으니까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었어요. 그러나 이러한 군란에 내 몸뚱이 산 것도 다행인데, 이 지방에 전답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그만큼 한 양반이 없었당께. 아주 호인이지.

마을에서 농민군이 된 집안은 모두 절단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 후손들끼리는 동병상련이랄까 서로를 위해 준단다.

우리 할아버지는 부자고, 고재호 할아버지[고순택]는 똑똑하고 헌게. 우리 같은 미출 같으면 내빼버리고 허지 일본놈들한테 한국 안 뺏길려고 가담허졌소. 그래서 더 고재호 씨하고 절친해요.

여기서 자주 ‘일본놈’이 등장하나 사실 재산 갈취는 토호와 아전들이 주로 저질렀다. 문노식 노인의 아련한 기억 너머로 자리하고 있는 할아버지 문덕중이 살던 곳은 무장현, 지금은 고창군에 속한 공음면 한사동이었다. “공음면 한사동 그 너머가 독천등이라고 석교, 도선산이여요. 여기 한사동서 사형제가 살다가 갑오년에 풍비박산 해버려. 삼십 호가 다 부셔졌더라나. 나는 올해 일흔여덟이여. 정사생이지.” 그리고 손자의 기억 속에 있는 할아버지는 이상형일 수밖에 없다. “체격이 쎘더래요. 키도 크고 얼굴이 잘 생기고 미남이래요. 한사동 홍농 이진사라고 그분네하고, 우리 한아씨가 말타고 오면 진사와 상놈이 말타고 다닌다고 그랬대요. 부자니까 말도 타고 그랬겠지요” 문덕중은 재산도 많고 문자속도 톡톡하여 주변에 이름을 날리던 인물이었던 관계로 농민군 중에서도 쉽사리 지도급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여그 한아버지는 접주에다가 말하자면 고창, 구례, 곡성, 남원, 임실, 순창 정시해 선생 다음에 전쟁허는 지도자의 역할을 했지. 두목자여. 이 양반이 이 지방에서는 두목 역할을 했어. 그런데 종조할아버지 말을 들은게 글도 잘하시고 전간재 선생의 제자라니까. 전간재 선생이라면 전라도 지방에서는 최고 선생 아닙니까.

전간재(田艮齋)는 당시 호남을 대표하던 유림 중의 한 사람. 그러니까 농민군과 대립하던 처지였는데, 문덕중이 그의 문하생이었다는 것도 특이한 경력이다. 그러나 농민전쟁에 문덕중이 참가한 것을 보면 전간재와는 시국에 대처하는 방법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접주하셨어. 대완구[옛날 포] 갖고 다니면서 일본놈하고 싸웠다고 그런 말은 들었어. 그러다가 섣달스무이레 날, 우리 할아버지가 먼저 잡혀갔대지. 무장 향교에다가 이름만 넣어놨으면 내 애가 안 타요. 무장 향교에다가 내가 이름을 넣었어. 고창에다 문화원에도 넣었고 그런게 이런 건 우리 한아씨 역사를 다 중요하게 두고. 새야새야 파랑새야 이 노래가 참 뜻있는 노래여.

잡혀간 날짜만 알고 언제 죽었는지도 몰라 잡혀간 날을 제삿날로 잡고 있는 문노식 노인. 할아버지의 원혼이 마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라는 애절한 노래에 담겨 있는 듯 괜히 그 노래만 들으면 그 옛날이 자꾸 떠오른다. 그럴수록 고재호가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는 말이 못내 걸린다. 자신은 살기에 바빠 그것도 못하란….

고재호 선생님이 나하고 절친한게 자꾸 내게다 말해. 고재호씨는 정읍문화원장하고 진작 알아서 책에도 실려 있어. 나는 이제사 늦게. 산 일을 하다 본게 정신도 없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비를 네 벌 다섯 벌 허고, 혼자 벌어다가 상을 열한 번을 놓아본게 집에서도 별로 좋아하질 않아. 이런 일을 해야 이 못난 사람이 해야 가승도 다, 오늘도 가승을 문중에서 하다가 서울서 손님 왔다고 해서 얼른 왔어.

증언하려고 만사를 제치고 왔다는 문노식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밝은 것 같다.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에 장곡리 축동이라는 데가 우리들 문씨들만 사는 동네여. 거기 가면 우리의 선산이 있어. 거기에 사당까장 있었어요. 그런데 역시나 갑오동학에 어느 정도 출입하는 집안에 안 들면 또 그 사람들에게 당하게 됩니다. 요새 당 같이 들어야 할 사람이 안 들면 나중에 그 사람들에게 맞아요. 그때 죽은 인구가 전라북도 공음만 하더라도 몇십 명이랍니다. 이 동네에 섣달 며칠날 제사가 많아요. 문성호씨라고 우리 종조할아버진데, 작당해서 나가서 전쟁을 허다가 결국은 그놈들한테 쫓겨가지고 인자 동네도 못 들어와 있고, 일본놈들이 잡으러 오니까, 산에서 있다가 추격당해가지고 결국 칼로 쳐부렸다는디. 그러고 사람을 죽였다요. 머리를 짤라가는 것은 보통이고.

이런 전쟁의 혼란에 사람의 목숨은 파리목숨보다도 못한 것.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을 수색하러 들어오면 동네는 살육의 아수라장이 되었고, 잡혀간 농민군은 물론이고 후손들의 삶이란 보장될 수 없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이곳저곳에 맡겨져 자랐는데 이때부터 가족들이 당한 고생과 어려움은 불문가지다.

우리 아버지는 진외갓집에 가서 크고 할머니가 인왕 전씨 전씬디, 전씨네 집이 공음면에서는 아주 부자여. 그래서 거기서 의탁했다는 거여. 우리 진외갓집이 홍농에 성계동 김씨여라우. 홍농 성계동서 선생질도 허고, 작은아버지는 어려서 손없는 오봉촌 한아씨 집에 양자보냈어. 그런게 사촌이 인자 멀어져버렸어. 십촌이 넘어버리지.

살기가 어려우면 양자로 보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 판에 학교는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었다.

학교 문 앞에도 가도 못했지요. 우리 아버지가 처가살이 가 계셨어요. 청주한씨요. 외할머니 모시고 계시다가 우리를 나서 키웠지요. 근데 일본 손아귀에 들어간게 맥을 못춰요. 풀잎 아니면 살 수가 없고. 갑오동학 때문에 영광[전남]으로 피해 삽니다. 동네가 한아버지 때 파산되고 보니까, 일가가 한 동네에서 다섯 집이 사는 데도 없습니다.

마침 문노식은 목수일을 배워 전국을 다니며 자식을 기르고 학교에도 보낼 수 있었지만, 그동안의 생활을 회상하면 비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농사를 짓다가, 집안 종제가 방앗간을 해서 거기서 일하다가. 큰아들이 특작을 하다가 많이 실패를 봤습니다. 한아버지가 동학 때 가담을 안했다면 [재산이] 굉장했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비참하기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그 한아씨 못난 손지[손자]가 대목[목수] 생활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지요. 우리 아들들도 농사를 짓지 않고 공무원, 장의사 등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그래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덕분에 자식 농사 만큼은 그런대로 지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농사일은….

전부가 농사를 안 짓는 것은 아니지만은 이 당대 내에서는 농사를 안 짓습니다. 왜냐하면 이 산과 들이 전부 덕중씨 땅이었습니다. 근디 그 땅을 뺏기고 나서는, 결국은 그때 그 땅이 없었드라면 우리가 이렇게 집중 폭격을 안 받을텐데, 그 땅이 있어서 이렇게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후손이 땅이 무신 필요 있냐? 그런 상탭니다. 이 어른은 직업이 목수가 직업입니다. 가운데 동생은 우체국 직원이었습니다. 그러고 막둥이는 원광대학 나와서 지금 현재 광주서 장의사 물건을 일체 취급허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그러기 때문에 농사를 안 짓고, 작년에도 너므 땅 빌려서 고추를 오십 마지기 해서 돈 천만 원 손해봤습니다. 작은아들은 농사에 대한 집중을 안는당게. 서울 가서 무슨 사업 설계 직원입니다. 지 앞가림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가겄다고 하는데, 여기 장곡이라는 데가 덕중씨 선대의 고향인디, 이 지방에서 희망은 문덕중씨가 살았던 동네를 복구하는 거요. 덕중씨 호가 장곡인디 장곡 선생의 본적지가 여그요. 갑오동학 때 계시다가 돌아가셨은게 현정부에서 비를 세워주는 것이 소원이지. 우리 선산 밑에다. [비를 세우는 것을 보고] 이 동네에서는 그런답디다. 즈그 한아씨 때 갑오 동학에 살림 망하고는 저 사람도 미쳤는가 빌빌 돌아다닌다고 그런답니다.

빼앗겼던 땅에 다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그때의 한이 되살아나서 생각할 수 없었다는 문노식 노인. “어떻게 허면 좋겠소? 그런게 한아버지 나라를 안 뺏길라고 싸웠다는 그것밖에 전 몰라요.” 그래서 정부가 비라도 세워주면 할아버지의 원혼과 후손들의 아픔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는 문노식 노인. 그도 이런 증언을 하면서 점차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광관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