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황해도 장연 농민군 지도자 김현일, 손자 인철
대상인물

김현일(金賢一)

?~?. 본관은 김해. 자는 곤일(坤一). 황해도 장연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

증언인물

김인철(金仁哲)




1929~ . 김현일의 손자. 진관(鎭寬), 관철 (寬哲)이라고도 부름. 1·4후퇴 때 전라북도 부안 개화도로 피난하여 부안농고를 1회로 졸업하고 신학교를 나와 목회일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1894년 농민전쟁 때 황해도에서도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황해도 농민군은 10월에 들어 감영이 있던 해주를 점령하였고, 이후 남쪽으로는 녹산·송림, 서쪽으로는 옹진·장연·죽산, 북쪽으로는 송화·신천·문화 등 황해도의 3분의 2가 ‘동학당’이라고 할 정도로 세력을 넓혀갔다. 11월 말 해주 남쪽과 서쪽에서 일본군과 싸움을 벌였을 때도 재령, 신천, 문화, 장연, 옹진, 강령 등지의 농민군 3만여 명이 참가하였다(『황해도동학당정토약기』). 이처럼 장연에서도 농민군 활동이 있었으며, 김현일은 이때 장연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하였던 듯하다. 그의 6대조는 서울에서 대감을 하다가 하향하여 황해도 신막에 거주하면서 자손이 마을을 이루었다. 김현일은 뜻이 있어 평양으로 가서 큰 한약방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한약을 배웠고, 17세쯤 주인집 딸과 결혼한 뒤 고향인 장연으로 돌아와 큰 한약방을 운영하였다. 대궐을 헐은 재목을 가져다가 열두 대문 99칸 집을 지을 정도로 생활이 부유했다. 체격도 장대했다고 한다. 한의사를 할 때 소들이 병들었는데 그 소를 사들여 연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부인도 의술을 알아 여자들 병을 고쳐주었다. 그의 손자인 증언자 김인철은 13세에 아버지 영균이 돌아가시고, 큰아버지 낙균에게 할아버지의 활동을 전해들었다. 할머니, 어머니가 간간히 들려주던 얘기도 떠올린다.

조부가 매우 부유한 생활을 했는데,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하루에 쌀을 수십 가마 가져다가 밥을 해먹였다고 해요. 호말을 타고 긴 칼을 차고 군사를 모으러 다녔고, 집 지하실에 못된 양반을 잡아다 쌀 수십 석씩 받아내 밥을 해먹이고, 말을 안 들으면 때리고, 고문을 했겠지요. 장연 지역의 책임자였다고 하는데, 무관 역할을 했다나 봅니다. 문관 역할을 했던 사람이 또 따로 있어 그이가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 글을 가르쳤다더군요.

관군이 쳐들어와 김현일은 강경(전라도인지 함경도인지 확실치 않음)으로 피신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소식이 두절되었으나, 다시 결혼해서 자식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고 한다. 잡혀 바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피신하여 살아남은 것 같다. 부인은 붙들려서 관군이 때리고 죽이려고 했으나, 높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니 죽이지 말고 살려주라고 해서 살아났다. 황해도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1895년에도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1895년 3월경부터 일본군과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있었다. 김현일이 도피하고 부인이 잡혔다 살아남았던 때가 이즈음이 아닐까 싶다. 황해도 감사는 체포한 농민군들을 4등급으로 나누어 처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그 중에 가산과 가족을 가지고 있어서 양민이 될 것이 확실한 자는 보증인을 세우게 하고 타이른 다음 석방하도록 하고, 강제로 동학도에 끌어들여진 자로서 그 정상이 용서될 만한 자는 타이른 다음에 석방하도록 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김현일의 부인은 이러한 처리과정에서 살아남았던 것 같다. 살아남은 김현일의 부인은 그 뒤 두 아들을 데리고 진남포 억양리로 피신하였고, 구멍가게 같은 것을 차려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묘가 평양 보통강변에 있다고 한다. 아들 형제들이 커서 큰아들은 서울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둘째아들은 평양으로 가 시계점을 하면서 생활기반을 닦았고, 열여섯에 결혼해서 진철, 진관(인철), 진명 형제를 낳았다. 인철의 큰아버지는 집안일에 힘쓰기보다 풍류를 좋아하였고, 제1공화국 때는 정악원 무용과장을 지냈으며, 그 아들은 연세대를 나와 미군정시 하지의 비서를 하고 부산대학교 문리대 학장도 지냈다. 증언자 김인철은 1·4후퇴 때 전라북도 부안 개화도로 피난하여 부안농고를 1회로 졸업하고 신학교를 나와 목회일에 종사하고 있다. 농민전쟁 백주년을 맞아 100년 전 할아버지의 활동을 돌이키며 그의 생각은 또 남다른 것이 있다.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장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에 대해 좀더 알고 싶은데, 가볼 수가 없어요. 큰아버지가 일정 말인가 언제 고향엘 가보았는데, 사람은 안 사는데 옛날 살던 집이 사당처럼 그대로 있더래요. 꼭 가봤으면 싶은데, 그래서 이이화 선생이 기독교 방송에 한번 나와서 농민봉긴가요, 이야기하길래 연락이 돼서 만나게 되었지요. 통일이 되면 꼭 찾아가 보아야지요.

다른 곳이야 비록 흔적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마음만 있다면 찾아 다니며 수소문을 해보기라도 할 수 있다. 증조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활동하던 땅을 밟으며 분위기라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황해도 지역 농민 전쟁의 터는 분단된 땅 저편에 있기 때문에 가볼 수조차 없다. 북쪽에 살고 있을 농민군의 후손들이 남쪽 땅으로 마음대로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농민전쟁 역사의 현장을, 다른 곳은 대부분 답사와 역사기행을 통하여 둘러보았지만, 황해도 지역만은 백주년을 맞아 가보지 못하고 해를 넘긴다. 그래서 100년 전의 역사는 이렇게도 분단된 현실에서 살아 만나는 것이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광관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