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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농민군으로 활동한 선달 김양두, 손자 종식
대상인물

김양두(金洋斗)

1845~1895. 본관은 김해. 자는 사익(士益). 전북 고창 출생. 18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달로 지내다 동학농민군으로 활동. 1895년 1월 5일 나주서 50세의 나이로 처형됨.

증언인물

김종식(金鍾植)




1930~ . 김양두의 증손자. 조실부모한 뒤 갖은 고생을 다하다 고향에 정착하여,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신흥부락에서 농사 짓고 있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김양식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1894년에 고창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약한 바 있는 김양두는 현재 그의 증손자가 살아있어 그에 관한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다. 그가 농민군으로 활동했음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로써, 그 과정에 대해 김종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들은 소린디 우리 증조 할아버지가 선달 벼슬을 해갖고, 아는 사람한테 홍패를 가지고 가서 얘기를 들어보니까 선전관으로 지내신 분이라고 그런게 한번 잘 노력을 해보라고 말씀을 헙디다. 저희들이 순전히 무식하고 무엇을 모르기 때문에 이제까지 묵인하고 있다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허는 소리를 들으니께, 고생허고 돌아가신 후손들이 거시기 유족회를 헌다고 허드라고. 그래 고창 문화원장님을 찾아갔더니 잘 찾아왔다고 그러드라고. 홍패와 족보를 뵈주니까, 족보를 등사하더구만요. 홍패는 벽에다 붙여서 사진을 찍어 원장님이 보관하고 있어요. 여기 홍패가 있어요. 재산은 있었는지 없었는지 저희들은 모르죠. 옛날 일이니까. 벼슬께나 하고 했으니까 재산은 있었겠지요.

이것으로 보아 김양두는 과거에 급제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학식과 재산이 있는 양반 출신이었다. 그리고 체격이 좋고 영리했던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김종식은 “얼굴도 이쁘고 체격도 좋고 그랬었대요. 얼굴도 미남이었대요. 신체도 참 좋고 말 들어보면, 재주가 있었든갑디다. 그런게 벼슬도 했겄지요. 재주가 있다는 건 영리했다는 거지요. 그전에는 영리한 걸 재주 있다고 했으니까요. 특별한 일화는 없어요”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가 농민군으로 활동한 이유는 비록 과거에 급제했어도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당시에는 과거제도가 극도로 문란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권력과 돈이 없는 경우 벼슬을 하기가 매우 힘든 사회였다. 그러니 그가 무과에 급제하였고 선전관을 지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쨌든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김양두도 참여하게 되는데, 전해오는 그의 활동상은 이러하였다.

이 양반이 독립운동하고 다녔다니께요. 정월 초닷새 날이 나주서 난리난 날이랍디다. 원장님이 잘 알아요. 돌아가신 날이 꼭 나주서 난리난 날이래요. 그날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다고 허더만요. 여기서 나주까지 일본놈들에게 잽혀갔으니 오죽했겠는가요. 허긴 여기서 잽혔는가 어디서 잽혔는가는 모르지만요. 나주에서 정월에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집안 할아버지들과 당신 아들이 같이 갔어요. 우리 할머니 말이 보신을 보면 속에다가 무슨 신표를 해놨응게로 그것을 보고 찾아라 그랬다고 했대요. 그리고 할아버지 옆구리에 점이 크게 있었다고 합디다. 그래서 그 점하고 보신의 신표를 보고 찾아 모셔왔다고 합니다.

이같은 증언내용은 김양두가 농민군으로 활동하다 나주서 처형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가 어디서 체포되었고 왜 활동지역인 고창을 떠나 나주서 처형되었는가’이다. 이에 대해서 김종식은 모처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나주로 끌려가 1895년 정월 초닷새에 처형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으나,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약간 와전된 것 같다. 9월에 전봉준을 따라 북상하지 않은 고창과 흥덕 일대 농민군은 10월에서 11월 장성과 나주지역으로 내려갔다. 김양두도 이때 나주지역으로 내려가 11월에서 12월 광주 전남지역에서 전개된 전투에 참여하다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고창에서 잡혀 나주까지 끌려간 농민군 사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으며, 당시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을 체포하는 즉시 현지에서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욱이 12월 초순 이후 나주에서는 농민군을 붙잡히는 대로 죽였으며 이후 약 한 달 동안 나주 부근에서 최소한 230명이 처형되었다는 일본측 기록이 보인다. 김양두의 경우도 이 시기,즉 정월 초닷새 나주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닌가 한다. 초닷새에 나주에서 큰 난리가 났는지의 여부는 자료상 확인이 어렵다. 아무튼 나주에서 시신을 찾아다 장례를 치른 김양두 집안은 있던 재산 모두 날리고 역적의 후손으로 몰려 갖은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지난 3대에 걸친 집안의 수난사를 회상하는 김종두의 증언에서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할아버지들이 집에 가 있지를 못허셨다는데요. 다른 데로 도망다니고 그랬답니다. 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면, 이 앞 논도 우리 것이었는데 다 없어져버렸고 우리도 가난하게 살고 먹는 것도 배부르게 못먹고 하니까 그런 줄 알라고 그랬지요. 평화시대 된다치면 우리도 사는 때가 있을 테니 그렇게 알고 살라고 그럽디다. 어려서 남매였는데 내가 아홉 살 먹고 동생이 네 살 먹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물정도 모르고 울 아부지가 우리 데리고 혼자 사시는디 밭도 없고 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집만 막근이 두 칸 지어놓고 살았어요. 제가 철 모르고, 아버지 어째서 우리는 논 한 마지기도 없고 밭 한 마지기도 없이 이렇게 허고 산다우? 그런게, 너는 몰라도 된다고 그럽디다. 그래도 내가 자꾸 그런 소리를 물어본게, 느그 증조 할아버지가 벼슬해서 참 부자로 살다가 일본놈들한티 잡혀 가지고 나주에서 돌아가셨고 전부 피난다니고 그러다가 재산도 다 없어져버렸다. 또 느그에게는 할아버지 되고 나에게는 아버지되는 양반도 고생하고 돌아다니시다가 돌아가셔서 시방 나만 이렇게 허고 사는게 그렇게 알고 살아라 하십디다.

모든 것을 세월 속에 묻어두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때를 기다리며 살라던 아버지의 한섞인 말씀을 떠올리면서, 김종식은 지난 60여 년의 갖은 역경을 구구절절이 술회하였다.

지가 열두 살 먹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버리네요. 그러니 어쩔 것이요. 어디 갈 데 올 데도 없고 아버지가 그나마 오두막 집 한 칸 있는 것도 먹을 것이 없은게 빚을 내다가 잡쉈던 모양이예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게 솥단지도 빼가버리고 다 가져가버리고 치상하고 난게 남은 게 있어야지요. 우리 두 남매만 남았어요. 할 수 없은게 외갓집으로 갔어요. 외갓집이 좀 괜찮게 살았어요. 외갓집에 간게 외할머니가 양외삼촌을 들여놓고 사는디, 양외삼촌이 내 꼴도 안 볼라고 혀. 우리 동생은 여기 인촌 선생 탯자리 있는 데 갈잎학교라고 있었어. 일정 때 갈잎학교라고 하면 다 알아요. 거기 교장 선생님이 수양딸을 둘라고 한다고 해서 그 선생님 수양딸로 맡겼어. 그라고 나는 나대로 돌아다닌 거여.

이렇게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이 조실부모한 김종식은 열세 살 때 함바집 아줌마하고 떡장사하던 일, 무작정 상경하여 주재소 심부름하던 일, 열네 살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머슴살이를 하던 일, 그러다 처가가 준 오두막과 논밭 네 마지기로 생활기반을 닦아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3대에 걸쳐 맺힌 한이 풀리었으면 하는 소박한 희망을 나타냈다.

순전 내가 자수성가 해가지고 논마지기[15마지기]나 장만하고 밭 댓마지기나 해서 그럭저럭 먹고 사요. 그러다가 할아버지 거시기 한다고 해서 자손으로서 어떻게 그 양반 거시기 한 것을 누명으로 놔둘 수도 없고. 그 공로는 어떻게든지 정부에서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그 한 풀기는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선조가 한 일에 대한 정당한 평가였다. 그것은 그동안 증조할아버지를 때로는 숨기고 때로는 잊고 살아온 김종식의 태도에서도,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그의 소박한 바람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양반 역사적으로 고생한 보람 있는 행동을 어떻게 쳐줘야지 그렇지 않아요? 큰 것은 바라지 않고, 그 양반이 우리 조선을 위해서 싸우신 분인 게 어떻게 해서든 조끔이라도 보람 있는 보답을 해줘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지게 짊어지고 댕기면서 돈 벌어다 그 양반 석물하면서 비는 하나 세워 드렸소. 이제 한 삼년 돼요. 막대기면 막대기 호미면 호미 모두 들고 나와 싸우다가 돌아가신 분들인데, 하다못해 탑이라도 세우고 기념관이라도 세워야지요. 그런데 묵묵부답인게 우리가 항의도 하고 그러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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