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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고승산 전투에서 희생당한 하수태, 증손 재호
대상인물

하수태(河壽泰)

1861 ~1894. 본관은 진양. 자는 대견(大見). 경남 산청 출생. 진주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그는 1894년 10월 14일 수곡 고승산 전투에서 전사함.

증언인물

하재호(河在浩)




1942~ . 하수태의 증손으로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서 태어나 줄곧 농사를 짓고 있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김양식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진주 지역은 동학농민전쟁시 경상도에서 전개된 최고의 격전지였다. 그런만큼 농민군 후손들도 많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보이나, 밝혀진 경우는 많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하수태인데, 현재 그의 증손인 하재호가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살고 있다. 그는 증조부 하수태가 살던 곳에 대해 “우리 고조부님이 진양군 수곡이거든예. 수곡에 가면 우리 집안이 많이 살아예. 거기에서 우리 증조부님이 열몇 살 먹어서 이리[현재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로 오셔 가지고 계속 살지요”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갑오년 당시 여기에서는 주로 무엇을 해먹었냐 하면 감자, 그때만 해도 산에다 화전하듯이 재를 뿌리고 감자와 담배를 했지요. 농사는 신경을 안 쓰고 못 죽어서 사는 형편이었고. 그때 배우는 건 서당이 있어서 한학을 다 전공을 했고. 이 골짜기도 옛날에는 집터고, 사람이 많이 살았어요. 저 골짝골짝이 다 화전을 한 데고 육이오 전만 해도 이백여 호 더 살았거든예, 한 사백여 호 살았나, 우리 부락만 해도 팔십여 호 살았어예. 골짝골짝에 숨어 밭이나 일구고 살았던 사람이 많았던 거라예.

체격에 대해서는 “우리 집안에서 지금도 제가 제일 작은데, 체격이 엄청시리 좋아요, 장사 소리를 듣고 돌아가신 우리 부친도 체격이 좋고, 얼굴도 미남이고 힘으로 말하면 큰 맷돌 같은 것을 져다 놓은 게 집에 있어요. 우리 집안 사람이 신장이고 뭐고 다 크고 그래요”라고 전한다. 이같은 증언 내용으로 보아 하수태는 진양군 수곡면에서 태어나 열몇 살경에 부친을 따라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로 이주하였고, 기골이 장대한 장사였다. 그리고 그의 집안은 시천면 골짜기 골짜기에 널려 있던 다른 농가와 마찬가지로 감자나 담배 농사를 주로 하는 빈농으로서, 서당 공부를 조금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로 하여금 주목을 끌게 하는 것은 그의 생활 기반이 수곡에서 시천에 이르는 지역인 점이다. 이곳은 현재 진양과 산청군으로 나뉘어 있으나 원래 진주에 속해 있었던 곳으로, 1862년 진주 농민항쟁 역시 덕천강 일대의 축곡·수곡·시천·덕산·삼장 등지의 초군[나무꾼]과 농민들이었다. 또한 이 일대는 1894년 서부경남 지역 동학도들의 중심지로서, 그 중에서도 덕산을 비롯 삼장·시천·사월·청암이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서부경남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제거하려면 진주의 농민군을 소탕해야 되고 진주를 토벌하려면 이들 지역에 사는 농민군을 토벌해야 된다고 할 정도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170쪽). 따라서 하수태의 부친은 1862년 농민항쟁에 직접 가담하거나 목격했을 것이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태어난 본인도 일찍부터 동학을 믿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동학 난이 일어났을 때 백도역이라고, 책자에는 백도홍이라고 나왔는데, 이 사람이 상당히 지혜가 높고 그래가 어른들 얘기 들어보면, 저 건너에다 기를 꽂아놓고 진을 치고 있었는데, 또 어떤 때는 여기에 기를 꽂아놓고 백도홍 그 사람이 여기에서는 총 주동인기라. 우리가 어른들한테 들은 노래에, 잡았니 잡았니 백도역이 잡았니 하는 것이 있었어. 주민들이 좋아싸서 불렀지. 왜 좋았는고 하니, 관에서 나와가지고 어디 숨었냐고 하면서 이 지역 사람을 막 잡아팼다고. 그러니 주민들이 시달리다 못해, 그런 노래를 불렀지. 저기 정자에 큰 아름드리 나무가 있어. 거기 앉아놀기 좋은데, 거기에 기를 꽂았다는 거라. 저기 청학동, 호남에서 넘어오는 재가 있고. 그 재를 넘으면 화개거든예. 의병란에도 요리 넘어다니면서 괴롭혔고, 동학군들도 저리 많이 넘어왔다고. 우리가 얘기를 듣기 전에도 녹두장군이 있었단다 하는 얘기는 다 알았거든예. 지금도 누구한테 물어도 녹두장군 얘기를 다 알고 있고 여기저기 가서 오래 산 사람들, 구십이나 넘는 어른들 얘기 들어보면, 그때만 해도 막 깃발을 꽂고 저 전라도 호남지역에서 녹두장군이 이리로 넘어오고 그래가지고 발기를 했다고

이러한 증언은 백도역(도홍)이 이 지역 동학도를 이끌었다는 점, 주민들이 백도역을 크게 따랐다는 점, 호남 농민군과 관계가 있었다는 점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사실들이다. 다만 1893년 3월 보은 집회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백도홍은 다음 해 4월 중순경 체포돼 효수되었다. 또한 이 지역 농민군과 깊이 관계가 있는 호남세력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아니라, 남원 혹은 순천과 광양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김인배 부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지리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산청군 시천면 대내리 일대에서도 농민군 활동이 대단히 활발했던 것만은 사실이며, 그 시기는 4월 백도홍이 처형된 이후 좀 진정되었다가 7, 8월에 다시 봉기해 9월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7월 중순 단성현 단계리 일대에는 남원 쪽에서 넘어온 농민군들이 크게 출몰하였고, 8월 2일경에는 산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9월 1일 이후부터는 순천의 영호도회소 농민군 부대가 진주 방면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진주 일대 농민군이 대대적으로 봉기해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9월 하순부터 10월 하순 사이에 서부경남 지역에서는 대·소규모의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고, 그 중에서도 10월 14일 수곡 고승산 전투가 대표적이었다. 이때 바로 하수태도 참여해 전사하였다.

그러고 있다가 저기 진양군 수곡면 고승당산이라고도 하고 고시랑산이라고도 하는데, 그전에는 고시랑산이라고 그랬어요. 우리 할머니들 얘기를 들어봐도 고시랑 당산이라고 그랬는데, 고시랑 당산이 무엇이고 그랬어요. 내려다보기가 좋은 자리거든. 어른들 말씀에 거기에서 왜군하고 싸웠는데 한 오백여 명이 죽었다고 그러거든요. 우째 그랬냐 하면, 우리 동학군들은 총도 없이 죽창과 돌멩이를 모아놓고 왜군들이 올라오면 돌이나 던질 줄 알고 그랬대요. 우리 증조부님도 거기서 전사를 했더랍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고 이 아래 내려가면 이종택 씨라고 백부 되는 두 분이 가서 세상을 베렸다고 그러네.

증언하고 있는 고승산 전투는 10월 14일 고승산에 올라 저항하던 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일본군이 수거한 농민군의 시체만 하더라도 186구나 되었고, 그밖에 주변에 버려진 것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부산부사원고』6, 545쪽).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이날 하수태도 숨진 채 시신이 버려져 있었다.

거기서 세상을 베렸는데, 그 이웃에 우리 고모할머니가 살아계셨더랍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라에서 동학에 가담했다고 쎄리 집구석을 조지고 잡아다 다 죽이는 판인지라, 고모할머니께서 밤에 살살 가가지고 시체를 확인해 대밭에다 묻어다 놨더랍니다. 우리 증조할머니가 그때 서른세 살이었는데, 밀양 박씬데, 엄청시레 힘이 좋고 섬을 옆으로 지고 다니던 소문난 할매거든예. 그래서 한 달쯤 후에 가서 이장을 했지요. 지금은 동당이라고, 시천면 동당리 뒷산에다가 모셨어예.

곳곳에 나뒹구는 시신들, 남몰래 시신을 찾아다 대밭에 묻는 고모할머니와 세상이 조금 조용해진 한 달 뒤에 이장하는 증조할머니, 참혹했던 농민군의 최후와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불안감이 생생히 느껴진다. 이같은 불안과 피해의식은 비록 남의 이목을 피해 시신을 수습하긴 하였어도,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옛날에 우리가 성묘를 가면 증조모님이, 가족까지 다 잡아다가 족치는 그런 단계라서 느그한테 얘기도 못하고 숨어서 세상을 살았다 그런 말씀을 하셨어예. 따로 피난을 가지는 않았지만, 설움은 많이 받고 살았어예. 그 이후에 묻히고 묻히고 넘어간께네. 우쨌건 왜놈들이 알까 싶어 두렵고 숨겨왔지예. 그때 밀양 박씨들이 증조모님의 친정인께네 친정에서 많이 도와줘서 겨우겨우. 글 안했으면 가정도 파괴되고 그랬을 텐데, 외가에서 도움을 줘서 살았다고.

농민군으로 활동한 것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그의 부인 밀양 박씨는 증손자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정도였다. 또한 증손자들도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더라도 가습 속 깊이 묻어둔 한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농민군의 후손이 살아온 산청은 지역적 특성상 해방 이후에도 우리 민족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경험한 여순사건과 빨치산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우리 나이가 일곱 살인가 먹었어요. 그런데 앞 동네에 한 열아홉 집 살아요. 반란군들이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와가지고, 열 살 이상인 사람을 불러놓고 밤새도록 짚신을 삼기는 거라. 그랬는데 조금 있다가 군인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와가지고 전쟁이 벌어진 게지. 막 총소리 나고, 우리는 방에 엎드려 있응게는 한참 싸우다가 그 사람들 붙들려 나가고 그것이 순천 반란 사건이라고. 그 이후에 육이오가 터졌는데, 여기가 빨치산들 본부지. 여기에 이영회 부대가 있었는데,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졸병으로 올라온 사람이 이영회거든. 이현상씨는 저 너머에서 죽었다고 하고, 김지회라는 사람도 저 너머 마천골에서 죽었다고 그러지. 그리고 우리가 알기에는 이영회 부대 사람들은 이리 매일 지나댕겼는데, 제일 마지막까지 경남 의령을 털고 들어오다가 잠복 부대에 걸려 죽었고 패잔병들은 이리 들어와가지고 있다가 결국 싹 잡혔지. 산속은 사람이 숨어 살기에 적당하니께 기어들어 온 거지. 더구나 육이오 때는 삼팔선에 올라가다가 못 올라가고 남은 사람들, 또 이 지역에서 배우고 그런 사람들, 옛날에는 대학생들이 다 서울 대학생들인데 이런 사람들이 좌경사상을 가지고 그래 했거든. 좀 공부한다고 대학교 다니던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다 죽었는데, 이 지역 사람들 많이 죽었어요. 그리고 똑똑하고 당시 말주변이나 하고 나서는 사람은 다 죽었지. 무식하고 들어앉은 사람은 살았고. 또 서울 대학생들 따라 총 메고 들어온 여자들도 다 죽었거든. 예쁜 아가씨들. 이 골짜기의 아가씨들은 아니고 그때 당시에 대학교를 다녔다면 아주 부유층에 있는 집구석의 딸이고 무식한 것도 아니고, 지리산 일대에서 수없이 죽어뿌렷지.

이러한 빨치산의 죽음은 비록 이념의 차이로 인한 것이긴 하나, 분명 우리 민족의 아픔인 것만은 사실이다. 농민군 후손이 경험한 빨치산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들으면서 자꾸만 1894년에 스러져간 농민군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농민군과 빨치산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바로 고난에 찬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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