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수병(金琇炳)
1860~1894. 본관은 김해. 자는 수복(秀福), 호는 운재(雲齋). 전북 고창 출생. 1890년대 초에 동학에 입도한 뒤 1894년에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고창에서 체포되어 1894년 12월 6일 35세의 나이로 처형됨.
김재덕(金在德)
1919~ . 김수병의 손자. 고창에서 줄곧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오다, 현재는 고창읍에서 미화사를 하고 있음.
김양식
다시피는 녹두꽃
1894년에 고창지역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김수병에 관해서는 다른 수많은 무명의 농민군처럼 현재 문헌에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김재덕이 살아 있어, 그가 고창에서 농민군으로 활동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김재덕은 할아버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살아계시면 백서른다섯 살쯤 돼요. 서른세 살에 갑오년 여름쯤 돌아가셨어요. 동학란이 일어나기 이삼 년 전부터 동학을 믿었어요.
재산은 “먹을 만치는 됐지요. 아주 있는 편도 아니고 없는 편도 아니고”라 했고, 벼슬은 “벼슬도 했는디 내가 지금 못 욉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전한다.
장군이여요. 할아버지 산소 일을 할 때 우리 할아버지 유해를 내가 봤기 때문에 알아요. 다리가 이만해요[매우 굵음]. 아주 그냥 장골이든게요. 보통 사람의 두 배쯤 돼요. 내가 우리 할아버지 장례를 몇 번 모셨는데요.
이러한 증언으로 보아, 김수병은 1860년경에 중농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기골이 장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90년이나 1891년에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이때는 전라도지방에서 동학 포교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전봉준·김개남·이방언 등도 이 시기에 입도하거나 중견간부로 성장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890년 초 이미 전라도에는 수만 명의 동학도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볼 때, 김수병이 이 무렵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증언은 사실로 보인다. 1890년 초 동학에 가입한 김수병이 언제 어떻게 농민군으로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는 김재덕도 잘 모르는 것 같으며, 분명한 것은 그의 고향인 고창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특히 그가 체포되어 참혹하게 처형된 상황은 생생히 전해지고 있어, 김수병이 농민군으로 크게 활동했음이 입증되고 있다. 고창서 활동했어요. 사형당했지요. 먼저 그 사진[전주 MBC 다큐멘터리를 말함]도 찍었습니다만, 큰 고목나무에다 묶어놓고 불로 지져서 돌아가셨어요. 딴 디 피해다니시다가 잡히셨어요. 어딘지는 잘 모르구요. 누가 밀고를 해서 고창서 잽혔지요, 호동[고창읍 호동리]사람들이 잘 알드만요. 시신은 할머니 혼자 바로 모셨지요. 동네 양반들도 거들어주었지요.
김수병이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점은 그가 고창지역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처형된 시기가 여름쯤 된다는 앞서의 증언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창의 경우 1894년 여름에는 농민군이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화중의 처남이기도 한 유공선(柳公先)은 여름 이후 휘하 농민군을 이끌고 고창과 인근 지역에서 그동안 못된 짓을 한 아전과 부호들을 혼내주는 등의 활동을 하다 10월에 2차 농민전쟁에 참여하였다. 10월 27일에는 고창 접주 신정옥(申正玉)도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기병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창이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과 일본군에 의해 완전 점령된 시기는 12월 2일이었고 이때부터 수많은 농민군이 색출 처형되었다. 피신해 있던 김수병도 이 무렵 붙잡혀 처형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김수병을 붙잡아 죽인 세력은 정부군이나 일본군 쪽보다는 그동안 농민군의 탄압을 받던 그 지역 양반들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군이나 일본군의 경우 농민군을 붙잡으면 총살하거나 목을 잘라 죽이는 경우가 많았던 데 반해, 양반들이 조직한 민보군의 경우에는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불태워 죽이는 예가 흔하였다. 김수병을 불에 지져 죽였다는 증언으로 보아, 그는 반농민적인 양반들의 손에 의해 처형당했을 개연성이 더 높다. 이렇게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 그의 후손은 다른 농민군의 후손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생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손자인 김재덕은 고난에 찬 지난 100년의 세월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탄압이라고 하면 뭐 말할 수 없지요. 우리 아버지가 유복자시거든. 우리 할머니가 낳으셔서 경찰이 저그 오면 아버지를 치마 밑에다 넣어 감추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는 학교도 못 댕기고 그랬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참 영리하신 분인데, 생계도 말할 수 없이 어려웠지요. 할머니가 어렵사리 넘의 집 가서 일도 쪼깨 해서 먹여 살리고 그랬지요. 우리 아버지는 혼자뿐이고, 제 형제는 팔남매예요, 오남 삼녀. 그 중에서 제가 장남이지요. 아버지도 배운 것이 없었고, 저희들도 겨우 국민학교 밖에 못 다녔지요. 지금도 농사는 없으니까 못 짓고, 저는 머스매만 여섯을 두었지요. 우리 큰아들이 약국하고 있구요.
치마 밑에 아버지를 감추던 할머니의 불안, 그나마 있던 재산도 날리고 품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할머니의 고생, 그 가난으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아버지와 본인. 농민군의 후손이 치러야 할 대가는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의에 비해 너무나 큰 희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손은 조부께서 나라를 위해 싸운 것에 감격해하고, 선조들의 희생이 제대로 평가받는 것으로서 지난날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한을 풀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 할아버님이 나라를 위해서 싸워주셨다는데 감격해하지요. 이 이상 경사가 더 있겠어요. 잊어버려서 기록도 못 됐고 흩어져서 있다가 인자 이거라도 발견해서 행사하고 그릉께 참 무고한 목심이 희생이 된 거 아니에요. 연구도 많이 진행되고 해서 개발을 해놓은께 나도 인제 분이래도 풀리고 자랑스럽지요.
김재덕은 말을 잇는 동안 계속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억지로 격한 감정을 참고 있었다. 이 같은 김재덕의 말에서, 그 무엇보다도 먼저 농민군 활동이 제대로 평가되는 것이 그의 후손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한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