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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화순 출신 나주 농민군 접주 한달문, 손자 우회·병만
대상인물

한달문(韓達文)

1859~1895. 본관은 청주. 자는 치화(致化), 달문(達文). 호는 묵헌(默軒), 족보명은 영우(英愚). 전남 화순군 도암면 출신으로 나주 농민군 접주로 나주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며, 농민군이 전반적으로 밀리던 12월중 나주 동창 유기모시굴 점등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12월 20일 나주옥에 수감됨. 옥에서 나와 장독으로 죽음.

증언인물

한관용(韓寬鏞), 한종용(韓宗鏞)




1937~ . 한달문의 손자. 일명 우회(宇會). 농업에 종사.
1923~ . 한일수(족보명 재명)의 아들. 일명 병만(秉蔓). 화순군 도암면 원천리 2구 동산마을에서 농업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어머님께 올리나이다. 제번하고 모자 이별 후로 소식이 서로 막혀 막막하였습니다. 남북으로 가셨으니 죽은 줄만 알고 소식이 없어 답답하였습니다. 처음에 나주 동창 유기모시굴 점등에서 죽을 고생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서 소자의 토시로 신표를 하여 보내어 어머님 함께 오시길 기다렸더니, 12월 20일 소식도 모르고 이날 나주옥으로 오니 소식이 끊어지고 노자 한 푼 없으니 우선 굶어죽게 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리요. 돈 삼백여 량이오면 어진 사람 만나 살 묘책이 있어 급히 사람을 보내니 어머님 불효한 자식을 급히 살려주시오. 그간 집안 유고를 몰라 기록하니 어머님 몸에 혹 유고 계시거든 옆 사람이라도 와야 하겠습니다. 부디부디 명심 불망하옵고 즉시 오시기를 차망복망하옵니다. 남은 말씀 무수하나 서로 만나 말 하옵기로 그만 그치나이다. 갑오년 12월 28일 달문(達文)상서(上書) [추신 부분] 온 사람과 함께 가 과세를 편히 할 터이니 혹 가고가 있어 못 오면 옥동(玉洞) 가고골 한기수에게 의복지어 보내소서.

위 편지는 한달문이 나주감옥에 갇혀서 어머니에게 구명을 요청한 것이다. 편지를 받은 집안에서는 돈을 급히 마련하여 한달문을 구해냈으나 옥중에서 맞은 후유증으로 그는 집에 도착한 이틀 후인 1895년 4월 1일 죽고 말았다. 당시 한달문의 집안은 피신중이어서 무슨 경황이 있었을까만 그런대로 재산이 있었다는 것이 위 편지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저희가 살던데는 화순군 포암면. 조부가 거기 있었지요. 한병만씨 댁이 큰집이지요. 사실 그때는 그 마을에서 그나저나 부귀하게 살았던 모양이에요. 살림이 넉넉하셨는데 그분이 동학대장하신 후로 살림이 파산해버렸지요. 잘은 모르지만, 내가 듣기에는 그분이 나주에 가서 동학대장을 했거든요.” 한달문의 손자 한우회가 조부에 대한 기억이 분명할 리 없고, 다만 집안이 넉넉했다는 것과 한달문이 나주에 가서 농민군 대장을 했다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한달문은 나주 쪽의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주 전투는 7월 1일 나주 대접주 오권선과 합세한 최경선이 농민군을 이끌고 노안면 금안동과 금성산 일대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5일 나주성을 공격한 것을 시발로 벌어진 싸움을 말하는데, 이 전투에서 최경선은 나주목사 민종열의 완강한 반격에 밀리고 말았다. 그 후 2차 기병 때 다시 나주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지는데, 11월에 들어 농민군이 나주성 북쪽 40리 거리에 있는 사창·용진산 일대에 진을 치고 관군과 접전을 벌인 것이 11월 13일, 다시 나주 서쪽 30리 지점의 고막포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 11월 16일, 마지막으로 금안면 남산촌과 태평정 등지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남산 일대에서 대접전이 벌어진 것이 11월 24일이었다(「금성정와론」). 농민군은 세 차례의 전투에서 한번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손화중, 최경선 등은 광주 쪽으로 퇴각하고 나머지 농민군은 부근으로 흩어졌다. 이때 민보군이 결성되어 관군에 협력하였다. 한달문도 이즈음 추격하는 관군의 예봉을 피하여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동창 쪽으로 퇴각한 것으로 보이며(한달문의 편지), 그곳에서 민보군과 소접전 끝에 체포되었던 것이다(「全羅道所捉·所獲東徒成冊」나주조). 편지에 나오는 한기수(재명의 동생, 족보명 재근)의 조카 한병만의 말을 들어보면 “책이 큰 농으로 네 개가 있었고, 절충장군(1886년에 교지를 받음) 벼슬도 하였지. 영암 세지 전투에 참여했고 자제들이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지요. 1887년 산송을 낸 문서가 남아 있는데, 매우 달필이고.” 절충장군까지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실직이 아니요. 직함만 있는 것이다. 그때면 돈으로 벼슬을 사던 민씨 세도정치기, 따라서 재산이 웬만큼 없으면 그런 교지를 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산은 많았고, 동네에 동학대장이 둘이 있었다고. 나대장, 한대장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한달문이었지요. 그 편지를 보고 조카[편지에 나오는 옥동 한기수와 그의 형 재명]가 가서 감옥에서 업고 나왔지.” 그런데 너무 많이 맞아 풀려났지만 곧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달문은 강도수(姜道守), 정사심(鄭士心), 이화삼(李化三), 주심언(朱心彦) 등과 함께 12월달에 나주 동부 다섯 면의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우진영에 인도되어 엄한 문초를 받고 나주옥에 갇혀 있었고(「全羅道所捉·所獲東徒成冊」나주조), 이때 편지를 보내어 구명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 후 집안은 고향에서 살지도 못하는 등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가지고 내가 어렸을 적에 거기서 살지도 못하고, 우리는 화순군 도곡면으로 이사를 가버렸고, 백부님은 옛날 서당공부를 해서 훈장한다고 돌아다니시고 그러니까 그 양반이 살림을 갖다줘버렸는가, 뺏겨버렸는가 잘 몰라요. 아버지 형제분은 삼남매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 형제가 형제분이시고. 내 위로 큰아버님이 계시고. 백부님이 그 난리를 만나고 결혼을 그때 막 하고 그랬는가봐요. 한아버지가 그러시니까 그때 막 결혼을 허시고는 곧 상처를 하셨어. 그러다 혼자 돌아다니시면서 사람도 얻지도 않고 글로 여생을 보내고 말아부렀어요. 그러고 우리 아버님만 그적에 누나 집이라고 고모가 계셨는데, 고리 피신을 가셨는가봐요. 도곡면이었어요. 큰 아버지는 다른 데로 돌아다니시고, 아버님은 누나집으로 가서 계시다가 결국에 나주로 왔는데. 그러니께 그때 있던 살림을 다 없애버렸어요. 살림은 그 골짜기에서도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쌀밥 먹을라면 우리 일하는 데 와서 협조해줬다는데, 그 뒤로는 완전 거지 돼버렸지요.

손자 한우회는 그동안 맺힌 한을 서서히 풀어놓고 있다.

거기서 살다가 내가 여섯 살 먹었을 때 나주로 갔었거든요. 그런게 우리 조부님은 그때 우리 선산 부근에 가서 훈련장이라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내가 어렸을 때 시제 모실 때 따라가니까, 선산에 갔다오시면서 집안어른들이 그래. 저기가 느그 한아버지 훈련장이라고 가르쳐주드라구요. 현재 봉암고등학교 자리가 되었는데. 그 후로 그분이 소식이 끊겼던 모양이예요. 그런데 나중에 인편에 기별이 오기를, 돌아가시게 되었으니까 업어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러니께 나주 지금 같으면 경찰서나 됐는데, 감옥에 갇혀 계시다 거기서 매를 많이 맞아가지고 돌아가시게 되니까, 그때 업고 와가지고 그 이틀날인가 돌아가셨대요.

여기서 말하는 ‘경찰서’는 사실 초토영(招討營)인데, 거기서 한달문이 잡혀있다가 풀려났다는 사실도 꽤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될 정도로 후손들은 어두운 세월 속에 정신없이 살아갔다. 거기다 한달문의 큰아들(한우회의 백부)조차 지난 역사의 무게에 눌려 입을 다물고 지내는 통에 손자 대에서 더욱 모를 수밖에.

그러고는 몰랐었지요. 그 후로 조부님이 동학대장하시다 실패하셨다는 말은 들었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님이 그래요. 조그만 [편지가] 책 속에서 나왔어요. 백부님이 책을 가지고 다니던 바구리 석이 있드만요. 그런데 백부님은 나주서 선생질하고 다니다가 돌아가셨어요. 책도 다 분실되어 버렸지요, 그 양반이 쓰던 책도. 그런데 책 한 권 들었다고 그러드라구요. 그 책 밑에서 국문으로 된 붓글씨로 쓴 편지가 나왔어요. 근거로는 그것밖에 안 남았어요. 그 안에도 면에서 그걸 밝히려고 애를 썼었거든요. 그런데 우리집에가 그랬다는 말은 있었지만, 근거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걸 우리가 어려서 봤는데 어디 가 있는지 못 찾겠드라구요. 그런데 그걸 찾은 거지요.

앞에 인용한 편지를 어렵사리 최근에야 찾아 100년의 세월을 성큼 뛰어넘어 할아버지 한달문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말이다.

동학대장하시다가 실패해가지고 잽혀서 들어가서 당했다는데, 편지 속에는 돈 삼백 냥을 부모님한테 해달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런께 그 돈을 갖다 주고 그분이 거기서 풀려나서 돌아가셨는가 어쨌나 모르겠는데, 돈 삼백 냥만 주면 풀려난다고 나와 있어요. 근디 거기서 그 양반이 실패한 자리는 나주군 세지면, 거기 기재되기는 무슨 점등이라고 써졌드만은, 거기서 실패를 했다고 기재됐드만요. 교지도 집에 있었어요. 그것도 인제 모두 가져가버렸어요. 은행[제일은행 광주지점]에 있는 조카가.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조차 스스로 간직하기 어려웠다는 손자 한우회의 목소리는 어쩌면 지난 100년의 역사가 철저히 기층 대중들을 외면한 역사였음을 상기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키도 장대하고 크셨든가 보던데요. 인물도 괜찮으셨는가봐요. 우리가 보들 못하고 나도 조실부모했기 때문에 세부적인 것을 못 들었지요. 지금 내가 백부님이 저 세 살 때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내가 열일고여덟 살 먹어서 돌아가시고 어려서 대개 그 소리만 듣고. 집안에서 그때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기를 동학대장하다가 그랬다고만 들었지.

더구나 백부와 아버지가 일찍 타계한 관계로 한우회가 듣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그 후로도 일제가 있었고 그러니까 역적으로 몰려 버리고 그래놔서요. 뭔 말도 못하고 표시도 못하고 그것이 숨겨 있었었지요. 그러다가 지금 세상이 바꿔지면서 이제사 발견되고 그러는데. 그러니까 그때도 알고도 뭔 말을 못하지. 서로 입을 묻어주고 그런 판이라서요.” 역적이라는 누명 속에 알고서도 입을 다물어야 했던 역사, 그래서 말 못할 설움이 쌓인 역사, 아픈 상처투성이의 역사를 밀고 이제 농민군의 후손은 일어서려 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사 우리가 성장해지면서 밥이라도 먹고 그렇게 됐지. 그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맨주먹 쥐고 나주로 나와가지고 살면서는 형편이 없었지요. 그 뒤로도 맨 숭년만 만나가지고 허다가, 지금은 농사짓고 있지요. 그때는 농사도 없이 여기 왔었지요.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겨우 여기 와서 노동일로 해서 좀 벌어서 자시고 그랬는가 봐요. 우리도 별로 배우도 못하고, 재정이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이제사 우리라도 밥이라도 먹게 됐고 애기들이라도 가르친다고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원래 본 끌텅이 없어버리니까 신착행이 어렵더구만요. 저는 지금 쉰여덟입니다. 전번에 해가기는 한관용으로 돼 있을 겁니다. 제 이름이 두 가진데, 호적에는 우회로 돼있고. 장남입니다. 제 밑으로 동생들 둘 있고.

손자 한우회의 바람이 있다면 할아버지의 행적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었다는 것을 무언가 표시하고 싶다는 것이다.

제 생각에는 그래요. 조부님이 그전에 그런 일을 하셨으니까, 그 양반 묘소라도 좀 낫게 해놓고 보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구요. 지금 현재 문민정부 돼가지고 이것을 밝히니까 그렇지, 그전에는 역적으로 몰려버리니 행세도 못하고 그랬으니까 못했지만은, 지금 이제 기회가 된다면은 그 양반의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작은할아버지가 농민군 대장을 한 덕분(?)에 큰집이었던 한병만의 집안도 큰 피해를 보았다. 그리하여 한기수의 아들 한병만의 삶 또한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는데 그대로 옮긴다.

여덟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막둥이라 아버지 연세가 많으셨지. 지금은 육십이 넘어도 나이묵은 티가 안나는데, 옛날에는 사십만 넘어도 수염이 길고 영감티가 나지 않았소. 그때도 농사가 없어가지고 아버지는 지게 품팔이나 하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는 소먹이는디 꼴베어 먹이고 밥 얻어먹었어. 형님들은 낳으면 죽고, 낳으면 죽고 해서 내가 막둥이로 태어나서 장남이 돼버렸어.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나 여덟 살인가 먹어서 여의버리고. 사형제였는데, 나하나 남고 누님도 시집가서 금방 돌아가셨어.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목포서 살아보고, 여수서 살아보고, 보성서 살아보고 그러다가 고향이라고 선산 있고, 그러다가 다시 돌아와서 살림 붙들고 사는 것이요. 내가 목포서 스물세 살에 팔일오 해방 맞아 돌아왔어. 목포에서 대바구니 짜는 기술을 배워 생활 중에 고향으로 돌아왔어. 집에 와서도 그 일을 했어라. 계속 그 일을 해서 한푼이라도 모타지면 밭 한 마지기 사고 논 한 마지기 사고. 내가 그 일을 한 오십대까지 했을 것이요. 현재는 농사일 하고, 육형제를 두었고, 딸 둘은 어려서 죽었고. 큰아들은 못 가르쳤소. 농촌에서 농사 서 마지기 하면 육백 평이요. 그리고 밭 두 마지기 하면 사백 평이고. 그래가지고 한 천 평 됨서 큰아들 남중학교를 보내버렸어. 광주서 남중학교 하면 일류학교는 못가도 그래도 중 이상가는 학굔디, 시험본게 들어갑디다. 삼년 딱 가르친게 그때는 국민학교도 납부금이 이백 원인가 있었어라. 그런데 광주로 중학교 보내놓은게 일년에 논 한 마지기 값 넘어 들어갑디다. 그런디 두 살씩 꼭 너이가 돼버리니까, 그 밑에 놈이 중학교 가야지. 시골에는 중학교도 없고, 광주서 가르치야 되는데, 그래서 할 수 없이 못 가르치고 중학교만 가르쳐 버리고 말았어라. 그러고 그 밑으로 둘째, 넷째는 지가 댕김시롱 대학까지 나왔어요. 그러고 그 밑으로는 시방 도암 농협부장하고, 그놈도 포듯이 광주농고만 보내고. 둘째도 처음에는 광주일고를 봤다가 떨어져 버리니까, 야간 기술과를 보낼려니까 선생들이 성일고등학교 기계과를 보내라고 그래. 그래서 시험을 봐서 수석을 해버렸어. 그래서 삼년간 댕김시롱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성남에 오피씨[OPC] 공장이라고 학교서 거길 보내버렀어. 거기 일년 있어본게 안되겠으니까, 지가 알아봐서 장성 고려세멘트로 시험 봐서 들어가 가지고, 지가 댕김시롱 야간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고려시멘트 기계설비과 과장으로 있어요. 그러고 큰놈은 남중학교 졸업하고 못 보내니께 전기기술 배워가지고 인부감독으로 있고. 셋째는 농협부장으로 있고. 넷째는 제일은행 다니고. 다섯째, 여섯째는 내가 옳게 대학을 가르쳤어요. 의대 나오고. 의대 나온 놈을 이년 딱 지내니께 막둥이가 대학 간다고, 사학년을 둘을 보내니께, 빚을 조금 지고 본게, 요걸로 마감을 해버리면 살아가면서 빚을 갚어버리겠는디, 계속 삼년을 더해야 되는데, 삼 년간 빚을 어떻게 할 것인가 했더니만 그저그저 넘겼어요. 그래가지고 그놈들 학교 졸업해버리고 촌에서 농사져서 돈이 안 모타[모아]져라우. 농사져서 기계적으로 맡겨 버리니까 그리 다 들어갑디다. 식량은 애기들 나눠주고. 내외가 조금 벌어가지고. 벼농사하고 고추도 하고 도라지도 심고, 감나무도 심어놨어라. 몇 년 되면 감 수확할 것이오. 이제 나이가 들었은게 뭣을 모르겠어라. 스물여덟에 육이오를 당했습니다. 입산도 했어라. 안하면 어쩔 것이요. 안에서 애기 낳고있는디 아무것도 없지. 농사도 안짓는 판이라. 그래서 나와버렸소. 나만 살면 뭣하냐, 가족이 살어야지 그래가지고 나와부럿어라. 그러니 개새끼 따라갈라고 그런다고, 그때는 순경보고 개라고 했으니까. 아니 나 살라고 그러니까 걱정 말라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양길로 그래가지고 생명이 보전되었지. 산간지대라 낮에는 경찰이 주둔해가지고 낮에는 경찰들이 오고, 밤에는 밤사람들이 오고, 참말로, 육이오 때는 말도 못해라. 요리 가면 저놈들이 볼라고 하고, 저리 가면 요놈들이 볼라고 하는 통에. 해방되고 고향에 왔을 때, 청년들이 좌익하다가 죽었어. 그때 인물 말 듣던 청년들이 몇 있었는데, 입산해서 다 죽어버렸어.

농민군 후손으로서 어느 누가 그런 역경을 맛보지 않았으리오만 그 또한 시대의 격류를 헤치며 살아온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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