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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현직관리로 농민군에 가담한 이태형, 증손 일행
대상인물

이태형(李泰亨)

1841~1894. 본명은 계균(啓均), 자는 태형(泰亨). 생부(生父)는 수헌(秀憲), 원헌에게 입양됨. 1888년에 무과 급제. 군산첨사(群山僉使)를 역임. 함평에서 태어나 농민군으로 활동중 같은 집안 사람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4년 12월 25일 나주에서 처형됨. 그의 아들인 충범은 후에 부친의 원수를 갚아(일명 이고창 사건) 효자로 칭함. 손자인 재욱(자는 성우)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을 지냄.

증언인물

이일행(李一行)




1931~ . 이태형의 증손. 진보운동을 하였으며 함평군 의료보험조합 대표이사를 역임하였음. 동생인 이연행은 현재 전남 도의원이고, 사업을 하고 있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이일행이 처음으로 쏟아놓는 말은 농민군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이 남들 못지 않았으나, 숨기고만 살아야 했던 세월에 대한 한탄이었다.

동학 관계에 대한 후손들의 고증이라는 것이 어려움이 많을 거여. 자료도 많이 없고, 집안에서도 역사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숨겨오고. 그래서 참 어려움이 많아요. 너무나도 오래도록 빛을 보질 못하고 늘 탄압받고 억압된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억압인지도 모르고 탄압인지도 모르고 묻혀왔던 것이 한스럽지. 또 메아리가 없으니 말하고 싶지도 않았지.

이일행은 특히 남들과 다르게 농민전쟁 당시 관군으로 있으면서도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농민군에 뛰어든 증조부이기에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우리 가문에 대해서보다도 가장 의미있는 것은 뭐이냐 하면 이 양반이 당시에 무과 급제자여. 무과에 급제자로 동학 당시에 직위가 우도수군절제사로 벼슬을 했어. 그때 당시는 역적으로 막 몰아부치니까 말도 못할 때지만 역사적으로 청군과 일군이 당시에 이 나라에 와서 정치적 영향을 미칠라고 하니까 외세를 배격하는 애국심에서 동학을 돕고 그렇게 했다는 것이여.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여. 동학에 참여해서 희생당하고 협조한 것도 한 것이지만, 관군의 입장에서 있으면서 그랬던 것이 대단히 훌륭한 용기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가 있어요. 동학봉기 이후에 함평은 1894년 4월 16일날 함평에 동학군이 입성을 했거든.

이태형은 고군산에 첨절제사로 있으면서도 수시로 함평에 나와 동지들과 비밀리에 밀담을 나누었다 한다. 그 장소는 주로 이태형의 집이었지만 가족들도 무슨 영문인지를 모를 정도로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사 때면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서 이태형 할아버지가 동학에 관여되었다는 옛 얘기들을 하신단 말이여. 우리집이 좀 넓고 그러니까 할아버지 집으로 모여들어 모의를 허시고. 벼슬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비밀로 쉬쉬하고, 문앞에 누가 오는가 사람을 세워놓고 경계를 허고. 그러니까 집안의 할머니나 가족들은 뭔일인가를 모르제. 어른들이 허시는 일인게. 그렇게 해오셨고. 아까 벼슬이름이 우도수군절도사라 했는데, 고군산우도수군절도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군산에서 배를 타고 주포[酒浦]라고 하는 포구가 있어. 함평읍에서 한 오 킬로 나가면. 그쪽으로 이 양반이 배를 타고 들어오시는 거여. 그러면 자꾸 집에서만 모의를 하시지 않으니까, 할아버지가 집으로 곧 오신다고 전령이 와. 오는디 오시지를 않고 그대로 돌아가셨다는 거여. 그런게 주포 포구 어느 한쪽에 자리를 치우고 거기서 중요한 모의지시를 하고 동학봉기의 지시를 허고 가셨다는 것이 후문이여. 집안에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그랬는 갑드라 이거여. 아 당연히 집에 오시는데 집에 안오시고 오신다는 전령만 왔다 이거여. 함평에서 백여 명이 동학봉기에 참여하고, 영광에서 함평으로 넘어오는디 함평에서 환영을 하고, 거기서 큰힘을 얻어가지고, 관군을 유도해서 장성 황룡촌에서 관군을 물리친 대승을 이루는 과정에서 우리 동학군들이 함평, 영광, 나주 변방으로 배회하면서 관군을 유도하면서 끄집어내가지고 장성 황룡촌에서 물리친 것이 아니냐 이거여. 전투에 참가보다도 그 동학군들이 이쪽에서 전봉준 선생과 같이 관군을 유도해서 끄집어내리는 역할을 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 군수물자라든가 쉽게 말하자면 소든지 식량이든지를 동학군에 지원해주는 대역사를 했다 이런 얘기지.

이태형의 윗대에는 그리 대단한 벼슬을 한 사람은 없었다.

윗대로는 큰 벼슬한 것이 없지. 그때 아들이 큰 벼슬을 하면은 아버님도 직접 그런 벼슬을 안해도 뭔 추증하는 게 있드만. 그래가지고 분명치 않지만 절도사 교지로 내려온 것이 있어. 그런데 내가 교통사고로 우리 고향의 집을 비워버리고 병원생활을 삼년 하는 사이에 잃어버렸어. 내가 교통사고로 죽게 되야가지고 살아나서 글 안하면 내 동생이나 아들들도 못헌다니까 이런 말을. 그거 갖다 누가 써먹을 사람도 없는데 거기에 고화가 같이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림을 가지고 가느라고 같이 가져가버렸어.

이태형에 대해서는 다른 일화들이 많았다. 그런 일화를 들어보면 현직 관리로 있던 이태형이 어떻게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는가 의문이 풀리기도 한다. 이태형은 당시의 관리로서는 보기 드물게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일행의 표현을 빌자면 ‘애국심’이 남달랐다.

양반집인데, 내 후손으로서도 그 양반 정신이 틀리드라니까. 왜냐하면 족보상으로도 나오는데 우리집이 큰집이고, 작은집 쪽이 전라도 만경에서 원님을 사신 분이 계셔. 집안 욕이 아니라 만경서 원님 살면서 농삿골이고 그러니까 거기서 농민들 수탈해가지고 함평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고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태형 할아버지는 군산에서 삼권을 장악하고 모든 걸 통치하고 사시면서도 옛집이 어떻게 생겼냐면, 초가집으로 말하자면 아주 청빈하게 지냈다는 것이 입증이 되야. 같은 집안에 작은집 할아버지는 벼슬해가지고 거기서 농민들 수탈해가지고 그 큰 부잣집을 유지하고 소작을 경영하고 그렇게 잘사셨는데, 그 당시에 이 할아버지는 그런 벼슬을 하고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 옛집을 우리가 후손으로 볼 적에 그렇게 청빈하게 지냈다는 것이 초가집 그대로 허술하게 사셨다는 것이 입증이 되드만. 그래서 우리들도 오히려 어렵게 살았던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되고, 보람있게 생각되는 면이 있지요. 아주 청빈하게 지냈어요. 평범한 농부들 가진 그대로 전답이 전부해서 얼마를 갖고 있었느냐하면 논 서 마지기 허고 집안 터까지 합해서 밭이 다섯 마지기. 그렇게 청빈하게 지냈다는 것이 입증이 되야. 그 양반 위치에서 볏섬지기나 유지할라면 어렵지 않은디 그런 사상을 청빈하게 가졌기 때문에 애국심에서 척양척왜하는 애국심에서 동학에도 협력이 되지 않았겠느냐.

그런데 이태형에 관해서는 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훗날 아비의 복수를 하여 함평 일대에서는 유명한 ‘이고창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그의 아들 충범에 대한 이야기가 오히려 흥미를 끌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도 수치스러운 일인디, 같은 우리 집안이래도 파가 틀려. 파가 쉽게 말하면 남산[南山]파라고 그래. 그런데 우리 함평 이씨에 크게 파가 두 개로 나놔진다면은, 우리는 효우공[孝友公]판데. 그쪽 후손이 여기가 이경인[李景寅]이라고 전라도 고창의 원님을 살았는데, 이 양반 이름을 몰랐다가 나도 인자 조사해서 알아봤어. 이것도 이 사람 후손들한테 물어봐야지 다른 사람은 모르드라고. 이 양반이 조정에 아부아첨해서 공신 노릇을 할려고, 우리 집안내력을 같은 집안 일가라 잘 알 것 아니여. 그런게 이 양반이 조정에다가 이태형씨를 고발을 했어. 지가 명예를 따고 잘 될라고. 그래서 동학 난이 나던 해에 잽혀갔지. 나주 목사골로 잽혀가서 처형을 당했단 말이여. 그러니까 우리도 알다시피 그 고발자가 누군지 알게 될 거 아니여. 그러니 태형씨 아들 되는 두회씨, 이 양반이 이경인씨를 원수로 생각할 수밖에 없지. 우리 집안은 역적으로 몰렸어. 자식들도 생활도 못하고 할머니들도 전부 피해댕기며 사는디, 피해댕기면서 여그를 원수갚음으로 죽여야 되겠다하고 칼을 갈아서 몸에다 품고 지내다가 어느 정도 동학이 평정된 후에 함평을 왔던가비여. 왔는데, 지금 현재 함평의 군농협자리 거기 누각같이 연회석이 있었어. 고창 원님이 함평에 놀러 왔응게 거기서 풍악을 울리고 주안상을 벌리고 있었어. 그것을 알고 두회씨가 칼을 뽑고 들어가서 부르는 말로는 일명 이고창, 이고창 이리 나오너라 하니까 지가 지은 죄를 아니까, 누각 마루 밑이 좀 높은데, 마루 밑으로 뛰어내려 숨었다 이 말이여. 다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이놈은 지가 죄지은 것을 아니까 마루 밑으로 숨었다고. 그런게 마루 밑으로 따라들어가서 이고창을 잡아서 할복해서 죽이고 간을 입에다 물고 창자를 끄집어서 온 몸에다 감고, 원수를 갚았다 하고 함평읍 거리를 칼춤을 추고 갔다는 사실이 있대. 그러니까 지금도 나이드신 어른들은 이고창을 죽여서 우리 할아버님이 칼춤을 추었다 하는 것은 지방고사로서 남아서 역사적 옛 이야기거리로 남아 있지. 촌수는 멀고[이고창과]. 이렇게 해놓은게 관가에서 두회씨를 잡아죽이려고 하니까, 이 할아버지는 글안해도 역적으로 되었는데, 이고창까지 죽였으니 초비상이 걸려서 잡아죽일 라고 하지. 그래가지고 집에서 살림을 못하고 내 할머니가 모씨 할머니인디 모씨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따로 숨어살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피해댕기는디.

그러나 잘못된 역사 탓으로 원수가 되었던 양 집안이 지금은 화해를 하였다 하며, 오히려 그 집안이 잘 안 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농민전쟁에 뛰어든 할아버지의 가슴도 결국 이런 것이었으리라 더듬어본다.

또 하나는 우리 아버님이 후손들끼리라도 원수갚음이나 보복이나 감정 처리가 일어날까 염려되니까 전혀 말씀을 안하시다가 54년인가 55년 되는 해, 우리 아버님이 어린 우리와 어머니에게 나 오늘 참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뭔 말씀이요. 그런게, 남주씨는 이고창 아들 아니라고? 이 아들이 딴디로 출가했는디 그 후손이 정근이라고 있어요. 이고창의 손주지. 정근이란 사람이 이고창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아버님하고 광주에서 만나게 되었어. 그래서 내 할아버지들이 서로 원수갚음을 한 것은 그때 역사적으로 불운했던 우리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이지 지금에 와서 우리 후손끼리 사감으로 가져야 될 일이냐 하고 그 후손들끼리 만나서 풀었어. 화해를 했지, 그래서 그날 아주 기분이 좋았다고 집에 오셔서 말씀하신 적이 있고 또 정근씨를 내가 서울에서 만났는데 아주 친절히 만났어요. 그렇게 전혀 흔적 없이 지냈는데, 안타까운 것은 이분들이 역사적으로 못된 짓을 해서 그런가 모르는디 그 후손들이 별로 피어나지 못하고 좋지를 못해. 그러고 어디서 사는지를 모르게 흩어져 살아. 뿌리가 없어져버렸어.

‘이고창 사건’ 자체가 범상치 않은 일이었던 만큼, 이충범에 대해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화가 수도 없이 많았다.

두회 할아버지는 피신하며 사시다가 참 재미있는 일화가 다 있어. 할머니 집안에 후손이 없어. 그런데 논마지기라도 갖고 살았든가, 논 스무 마지기를 처갓집에서 주었어. 그래서 스무 마지기를 농사를 지었어. 그런데 피해다니느라 자식으로서 제사를 제대로 못 지냈지. 어디 산비탈에 기대서 기일이나 안 잊어버리고 눈을 감고 그랬어. 그것이 한이 됐어. 처갓집에서 논 스무 마지기를 줘서 농사를 지었는디, 가을에 나락이 누렇게 익었는디 나락이 전부 익은 놈까지 논 스무 마지기를 전부 팔아가지고 아버지 제사를 지냈어. 그런게 나주 무안 영광 함평 이 근동에 인접한 군민들이 거의 다 찾아와서 그때사 제대로 조문을 헌 거여. 그 조문하는 분들한테 대접하기 위해서 논 스무 마지기를 싹 팔아가지고 제사를 훌륭하니 지내버렸어. 그때나 지금이나 논 스무 마지기면 상당하거든. 그러니 모씨 할머니가 내 먹을 것도 없이 전부 다 그렁게 제사 때마다 그것이 할머니들끼리 우스갯거리야. 그렁게 자기는 생각을 안하고 오직 부모를 위해서만 그렇게 효성을 부린 두회씨 할아버지다 그것으로 입증이 되야. 그것이 아주 유명한 일화지.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그래서 그런가 우리도 맨날 있는 대로 써버리네.

이태형은 농민전쟁의 막바지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으나, 남은 가족들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그의 아들 충범이 아비의 복수를 한 후로는 탄압이나 감시가 더욱 모질어졌다고 한다.

교수형 처리가 된 것으로 전해들었지. 시신은 집안으로 통보가 오니까. 집안에서 모셔다가. 제사 날짜를 보면은 음력으로 12월 25일이니까 24일에 돌아가셨지. 할머니들은 그때 대개는 연령으로 봐서 출가를 하셨고, 출가한 사우[사위]들까지도 숨어살게 되고. 우리 할아버지들은 정처없이 방랑을 하고. 그래서 우리는 태형씨 할아버지가 동학관계로 인해 처형을 당하고, 두회씨 할아버지가 역사적으로 보복을 허고. 우리 가족은 말하자면 집도 절도 없이 피해댕기는데, 우리 집안에서 우리를 살게끔 현재 사는 집도 지어주고, 나중에 일본놈들이 통치를 하고 우리나라를 합방해서 관리하게 되면서는 자연히 이건 유야무야 돼버렸지. 관권이 거기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일제 통치를 중심으로 집중돼버리니까. 그래서 집이라도 거처하고 살아야 될 것 아니냐 해서 아까 말한 우리집 작은집의 할아버지가 만경 원님을 지내셨는데 그분이 집을 지어주셨지. 우리가 큰집인데, 큰집 후손이 집도 절도 없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해서 집을 지어주어 살게 된 집이 우리집이고 옛집은 없어져버리고. 관가에서 심히 탄압을 해버링게 집을 간수도 못하고, 나중에 비어놓은게 썩어서 나자빠져버린 결과가 돼버렸지. 그런 역사적 수난을 겪은 후손이라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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