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김병철(金柄喆)
1865~1894(?). 본관은 경주. 자는 성룡(成龍). 1차 농민전쟁 때 농민군의 주요 근거지였던 백산 부근 동진면 안성리에 살면서 농민군에 참여하여 활동함. 정확한 사망일자를 모름.
김영신(金永信)
1930~ . 김병철의 종손. 6·25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었고, 법원에 오랫동안 근무하였으며, 현재 천도교 도정이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중.
김양식
다시피는 녹두꽃
김병철은 백산에서 가까운 동진면 안성리에 살다가 백산기포 이후 농민전쟁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활동내용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종손 김영신은 그 내용을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은 갑오난 때 종조할아버지가 갑오에 참전했었다. 참전한 것만 알지, 어디서 어떻게 죽고 뭣하고 한 건 전혀 모르고.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것은 증언자가 20대 즈음이었다. 제사상에 밥을 세 그릇씩 올려놓는 것이 궁금해 물어보자 아버지가 대답해준 말이었다.
할아버지 제사날 젯상에 밥만 한 그릇 더 담아서 그렇게 수 십년을 모셔온 거지요. 대개 집안에 할머니가 두 분이라든지 또는 다른 뭐가 있으면 몰라도 그러지 않으면 밥을 두 그릇만 담아 놓는 게 원칙이라고. 그런데 밥을 언제든지 세 그릇을 담어놔. 그런데 어려서는 그걸 몰랐어요. 제사니까 그런가보다 하면서 절하라면 절하고 그랬는데, 철이 들면서 할머니가 더 계시냐 하니까 아니라면서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그 말씀 하시고 십 년 후에 아버지가 작별을 했어. 그 후에 늘상 그 말씀이 사무쳐 있었지요.
증언자는 백산 금판리에 사는 강제옥이라고 하는 분의 따님과 결혼을 했는데, 장인되시는 분도 동학을 믿고 있었고, 처 할아버지도 ‘동학란’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가 1950년대였는데 당시는 동학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지나쳐버렸다. 그런데 처남 강금성이 전라도 도정으로 있으면서 동학에 입도시키려고 맹렬히 설명하는 바람에 끌리게 되었고, 34년 전에 입교를 하였다. 1977~1978년부터 동학에 심취되어 이것저것 역사 자료도 보면서 천도교 중앙 총부의 감사를 지냈다. 그때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던 작은할아버지의 활동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할아버지들이 원래 살았던 곳이 부안 동진면 안성리라는 점과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으로 보아 작은할아버지의 활동을 이렇게 추측한다.
동진면하고 백산하고는 바로 이웃면입니다. 불과 일이 키로 정도지, 더 떨어지지도 않았지요. 그러니까 내가 추측하기로는 백산기포 당시 동진면 안성리니깐, 거기서 충분히 소문에 의해서라도 휩싸였을 것이요. 아버지의 말에 의한다면 동학혁명 일차봉기 때 가담이 되었지 않겠느냐, 그래서 옥신각신 이리 닥치고 저리 닥칠 때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백산기포 때 나간 걸로 봐야지요.
참가한 작은할아버지 김병철에 대해 김영신은 할아버지나 집안의 특성으로 보아 공부도 좀했고, 상당히 체구나 완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 한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이 단위의 이장 정도 되는 집강 노릇을 했고(집강소기의 집강과는 다름), 근방에서 선생님 말을 듣곤 했다는 것을 보면 동생도 나름대로 공부가 되어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할아버지는 짚단 4다발을 엮은 이엉을 한 손으로 지붕 위로 던져서 12단까지를 던졌다고 하고, 집안간에 콩섬을 안아 지게에 지고 간 사람, 일정 때 공출 나락 가마 105근짜리를 5가마나 짊어진 사람이 있었고, 자신도 28살 때 200근 머구리 저울에다 200근 추를 놓고서 그걸 고놨다고 한다.
해서 물내를 따져 올라가며는 대개 기골이 장대해서 어느 모임이던지 뽑혀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왜소해가지고, 뭐 있으나마나 할 정도 같으면 모르지만, 상당히 체구나 완력이 있는 그런 씨알들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은 차출이 되지 않았겠느냐 하는 거지.
동생이 농민전쟁에 참가했지만 형인 증언자의 할아버지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러니까 갑오혁명 당시에 그 양반이 오십여섯 살인지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연령적으로 봐서 그런 데 가담할 만한 나이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양반은 학식도 좀 있고 경주 김가 계림군파니까 꽤 양반 자랑을 하고, 집강 첩지가 있는 걸로 봐서는 유교계통의 무슨 직함이 있었지 않겠느냐. 그로 봐서 동학과는 좀 거리를 두었지 않았겠느냐. 그런 생각이고.
그러나 형보다 20여 세나 아래였던 김병철은 20대 중반의 팔팔한 나이에 힘도 있었다. 세상 되어가는 꼴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다가 ‘옥신각신 이리 닥치고 저리 닥칠 때 돌아가셨을’ 그에게는 후손이 전혀 없다. 족보에도 이름이 빠져버렸고, 가승에만 병자 철자로 이름이 올라있을 뿐이다. 농민전쟁이 끝난 뒤 증언자의 할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주산면 쪽으로 이사를 갔고, 일제 때는 “왜놈들의 뭣을 피하기 위해서 갔는지” 큰아버지는 황해도 벽성군 벽성면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고, 아버지도 거기로 가서 살다 왔다. 백산 주변의 상서면에 자리를 잡은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10남매를 낳아 둘이 죽고 아들 넷 딸 넷을 키우면서 “근검 절약을 하셔갔고 소도 몇 마리 되고 논밭이 만여 평되었으니까 그렇게 아쉽게는 안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증언자가 13세 때쯤 공출이 문제가 되어 아버지가 뺨을 맞는 것을 보고부터 일본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 가지 내가 열세 살 먹어선가, 열세 살이 채 안되었을 거예요. 흉년이 지나고 나서 공출이 이백열 가마가 나왔다고. 그래 이백여 가마를 내고 한 열 가마를 모자라게 냈는데, 일본놈 주재소에서 아버지한테 호출장이 나와가지구 아버지 뒤를 따라가보니까 아버지가 주재소 순사한테 고문은 아니지만 귀뺨을 맞고 그러드라고. 그때부터 좌우간 일본사람은 내가 싫어해 왔죠. 학교를 다니면서 늘 한시도 일본놈이라고 하는 것을 잊어 본 적이 없죠. 어떻게 해서든 일본은 이겨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있는 거고.
해방 후 증언자는 6·25에 참전해서 국가유공자가 되었고, 6·25 때 임진강 전투에서 12월 30일 부상당해 상이용사회에 가담되어 있고, 그리고 부안 등기소와 정읍 법원, 서울 민사 지방법원, 대전 지방법원 등 법원에서 17년 동안 근무를 하다가 1974년에 그만두었다. 1972년에는 전재산을 들여 무한동력을 만든다고 하다가 알거지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천도교 활동에 열성을 보여 『신인간』주간, 종무위원, 동학민족통일회 간사를 지냈다. 지금은 전라포 도정이다. 그는 탄압자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만 농민군의 기록은 거의 없는 현실에서 ‘증언록’ 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법조계에 오래 있다보니까 재판소에서 피고를 심판하는데 판사가 증언을 듣는다 그런 얘기여. 서증이 두번째여, 인증이 첫째고. 사람말이 첫째다 그런 얘기여. 사람 말이 첫째라고 하는 것은 인권을 존중하고 그 사람 양심을 보는 거고 여러가지 그런 차원에서 사람 증인이 첫째, 인증이 없을 때는 서증, 서증이 없을 때 방증이 되는 건데, 우리도 증언록을 하면서 나도 증인이나 마찬가지지, 내가 보지고 듣지도 못한 얘기여.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어쨌다드라, 이것이 증언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을 무시하기로 하면 더이상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아니고 후손이 이야기하는 것이 진짜다라고 인정을 해준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고 그래서 우리도 이 증언록이 우리 동학이 걸어온 역사를 규명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농민군의 후손들이 만든 유족회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포괄하여 ‘동학’의 역사를 빛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동학의 역사를 빛내냐 못 내냐 그런 분기점도 된다고 그렇게 봅니다. 지금 회원이라고 해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고 있기는 하지만 그분들을 한 분도 거부할 생각이 없어요. 그분들이 후손이냐 아니냐 이것을 우리가 여기서 몇이 앉아서 기다 아니다 하는데 그것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 얘깁니다. 왜 그러냐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보국안민이니까 자기목숨을 버렸기 때문이예요. 그런 측면에서 회원이라고 말하는 그런 분들은 들어오는 대로 환영을 해야 한다고. 만약 여기서 그분의 자료라든지 무엇이 좀 희박하거나 희미하다고 거부해버려서는 안된다고 보는 것이죠. 있는 대로 발굴을 해서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하나의 힘으로 승화해야겠다, 그래서 국가장래에 귀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소원이라면 그것뿐이 없어요. 이 소원이라도 풀어지면 천만다행으로 알고 어떻게 되어서든지 이 점을 아는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그런 역사를 발굴하고 회 원을 발굴하는 데 힘을 합해 자기역량을 최대한 발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