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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무장기포의 구심점 고순택, 손자 재호
대상인물

고창주(高昶株)

1858~1895. 본관은 장흥. 자는 순택(舜澤 혹은 順宅). 무장의 농민군 접주로 1차 기병 때부터 전봉준을 보좌하면서 농민전쟁에 참가하였고, 1895년 3월 3일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무죄 방면되었으나 귀향 도중 정읍에서 체포되어 1895년 3월 27일 포살당함.

증언인물

고재호(高在鎬)




1924~ . 전북 고창에서 농업에 종사.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우윤

출전

다시피는 녹두꽃

내 용

여느 농민군과는 달리 그래도 고순택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어 후손들의 아쉬움을 크게 달래주고 있다. 1895년 3월 3일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내린 판결선고문인데, “전라도 무장거 농업 평민 피고 고순택을 무죄 방송한다”는 선고내용이 분명히 적혀 있다(총무처 정부기록 보존소, 『동학관련판결문집』, 41쪽). 손자 고재호는 복사해둔 그 선고문을 보면서 무장의 농민군 접주였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새삼 떠올린다.

뜨내기 소문으로 그저 전설 비스름하지요. 우리 할아버지가 접주라고 옆에 사람들도 얘기허니까 인자 그런 줄만 알았는데, 정읍문화원장을 찾아 간께 그이가 혁명사를 편집했드만. 여그를 보니까 할아버지가 나와 계셔요. 아까 그 공판 받은 거도 나와 있고. 요거요. 정읍문화원장이 그전에 서울 가서 공판기록 복사해온 것 같아요.

연령을 잊은 듯 할아버지 이야기면 젊은이 못지 않게 힘이 나는 고재호 노인이다. “글도 잘 하시고, 말도 타고 다니고, 활도 가지고 다니셨다드만. 아버지도 그때 열다섯 살 자셨는데, 말타고 다니던 말씀을 하셨지.” 고재호는 농민전쟁에 참가한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증언자 중의 한 사람이다. 고순택이 살며 활동하던 곳은 현재 고창군 공음면으로 바뀐 구수내 일대였다.

구수내지요. 아버지가 그때 열다섯 살 자셔가지고 전주 작전, 황토재 작전, 장성 황룡촌 작전에 할아버지를 따라다녔어. 아버지가 강자 철자야, 자는 상옥이고 할아버지는 구수내에서만 산 것이 아니고 단지동이라고 진사들 많이 있는 동네에서도 살았다고 그래요. 그런데 단지동 가서는 얼마 안계셨는데 진사들이 돈을 꾸어다가 떼어먹어버렸대. 말하자면 갑오년이 당해가지고 갚는다 갚는다 하다가 섣달그믐이면 머슴들 놓고 공갈치고 해서는 억지 패를 만들어 도장 찍으라고 했대. 돈은 가서[가사] 닷 냥을 꿔주었으면 오십 냥 꿔간 것으로 해가지고 날인을 받고 그런 짓거리를 양반들이 했다 이것이여. 효령대군 단지동 이씨라고 해서 진사가 여덟 명인가 나오고. 그 앞 지날 때는 시집오는 여자들도 가마에서 내려서 가라 하고, 장에 닭만 가지고 가도 뺏어먹는 그런 사람들이 양반이었지. 그 동네 가서 할아버지가 사셨으니까 쪼까 똑똑한 거 같애. 내가 생각해도.

이를테면 할아버지가 그 단지동 진사들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뱃심이 세었다는 이야긴데, 그런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계속된다.

미출로 생기지는 않고. 어디 지나가면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미남이신 것 같아요. 체격은 선비고 무관틀은 아닌 것 같았어요. 일화 한 가지는 돌팔매를 잘 쏘셨다드만. 구수내에 가면 정자나무가 있는데 할아버지 살던 집이 그 안뜰이었는데, 거기서 팔매를 쏘면 정자나무를 넘겼다고 해요. 일반사람 팔매보다 훨씬 더 나간 것 같아요. 우리 형님이 또 팔매를 잘 쏘셨는데…, 제가 팔매 쏘는 걸 직접 봤는데 납작하고 요만한 걸 들고 와서 되게 쏘면 다른 것은 요렇게 가서 요렇게 떨어지는디 형님 팔매는 쉿쉿 돌아나가는 소리가 나더구만요. 직선으로 나가는 게 멀리 나가는 모양이에요.

고재호의 증언에 따르면 고순택은 구수내 일대에서 제법 세력이 큰 접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농민전쟁의 첫 기병지가 바로 구수내로 정해졌다는 중요한 이야기를 고재호는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동학은 그전에부터 믿었겠지요. 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전녹두 전대장이 혼자 기병할 수가 없으니까 손화중 그 냥반한테 갔는데, 영무장에 가서 고순택이 하고 누구누구를 만나서 타협을 해가지고 인자 기병해라 했다는 말은 들었어요. 영무장이 바로 여그 구수내 구역을 다스리는 원이 있는 데가 무장이지요. 그 읍내예요.

1894년 고부 봉기가 신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에 의해 해산 쪽으로 방향이 잡히자 전봉준과 그의 직속 간부들은 총·창 수백 개를 말목장 터 주변의 인가에 비밀히 분산시키고 고부를 표연히 떠나 무장으로 달려갔다.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무장에 내려온 전봉준은 손화중을 설복시켰고, 마침내 3월 20일 본격적으로 농민전쟁이 터졌다. 구한말 유생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열흘간 수만 명이 모였는데, 동학(東學)과 난민(亂民 : 농민군-인용자)이 합한 것은 여기서부터다”고 하여 동학과 난민의 결합으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고 적고 있는데, 고재호의 증언은 바로 기병과정에서 고순택의 역할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에 따라 구수내가 기병장소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사료에서 발견할 수 없는 귀중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기병장소에 대한 이야기다. “거가 목세등이 있었는디, 나는 대밭을 쳐서 가져온 그 대밭을 얘기를 했는디 지금 대학교 교수들은 딴 데를 얘기하는 것 같아요 군대 일으킨 장소가 여기서 오 리밖에 안됩니다.” 구수내에서 기병한 후 농민군은 무장을 들이치고 고부까지 다시 올라 갔는데, 전봉준은 우선 고창으로 달려와 본대를 잠시 머무르게 하고 선발대를 뽑아 줄포를 거쳐 고부에 들어가도록 하였고, 자신은 선발대를 뒤따라 본대 4천여 명을 이끌고 고부를 향해 출발하였다. 줄포에서 고부로 진격하는 농민군의 상황을 적은 기록에 보면 “농민군은 척후기를 선두로 청·홍·백·황·흑(靑紅白黃黑)의 5색으로 각 부대를 표시하였고, 깃발을 상하 좌우로 흔들며 혹은 급하게 혹은 느리게 흔들어 전(全)부대의 진퇴를 지휘할 정도로 규율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 이들의 무기는 주로 죽창·궁전(弓箭)·쇠창 등이며, 총은 재래식의 화승총이 대부분이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1, 「고부민요일기」)고 하여, 농민군의 진용이 제법 갖추어져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때 길가에 늘어선 사람들은 “옳지, 하늘이 어찌 무심하랴. 이놈의 세상은 망하고 새 세상이 나와야 한다”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농민군에 거는 기대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고순택과 그의 아들 강철도 바로 그 농민군 대열에 합류하여 줄포를 거쳐 고부로 진격했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가 인자 어려서, 나주 쪽에서 올라와서 황룡강 오고 한 얘기는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여기서 기병해가지고 무장 동헌으로 가서 허물기도 허고 그랬다고 허십디다. 무장은 여기서 가찹습니다. 이십리밖에 안되니까. 창을 깎아서 서까래에다가 열 개고 스무 개고 쭉 쳐가지고서 하나 둘 셋 해서 전부 치켜들어 버리면 웬만한 집은 지붕은 다 넘어가버린답니다. 말하자면 인중성천[人衆成川]이라고 사람이 많고 대를 많이 넣고 한꺼번에 힘이 올라간께 기와집 지붕이 벗겨져 버려요. 그렇게 해서 집 허무는 데를 봤다 이러십디다. 그래서 제가 들은 것으로 허면 무장 치고 고창, 흥덕, 고부, 신태인 그렇게 치고 전주가서 실패허고 내려오면서 황토재에서 이겼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고재호 노인은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 황토재 전투의 시점이 전주성 공방전 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기록에 따르면 분명 황토재 전투는 4월 7일에 치러졌고 전주성 공방전(4월 말과 5월 초)보다 뒤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착각은 당시 유사한 정황 속에서 나온 것 같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3월 26일경, 고부 백산으로부터 화호나루터 신덕정으로 나와 포를 쏘고 함성을 지르며 전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드디어 3월 29일 저녁 태인을 들이쳐 무기를 접수하고 다음날 오전 원평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감영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본진의 머리를 도로 태인 쪽으로 돌렸다. 따라서 농민군은 전주를 눈앞에 두고 회진한 셈이고 그 후 황토재 전투를 치렀으니, 당시 태인까지 진격한 농민군 대열에 끼지 않은 사람은 그러한 착각을 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황토재에서 이기고 전주 올라간 것이 아니여. 실패하고 내라오다가 갔지. 거기 가 관군들 밥해다 준 곳은 내촌이라고 이쪽 내머립니다. 그리고 저쪽 상악, 중악, 하악 쪽은 동학군들 밥을 해다 줬어. 이렇게 양쪽에서 밥은 해다 주었는디, 관군들은 대덕산이라고 거기서 진을 치고 동학군은 얕차운 가정리 위에 가서 진을 쳤는디 [관군이] 자기들이 높은 디 진을 치고 무기도 좋고 헌게 자만해 버렸어. 그래가지고 동학 척후병이 올라가서 본께 전부 소잡아 먹고 양식 먹고 총도 이렇게 괴어놓고 자고 있은게 때는 이때다 하고 야습을 해버렸더구만요. 저도 거기서 십년간 살면서 대덕산 가봤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가 낭떨어지여. 도망가면 다 떨어져서 죽게 되어 있어. 그래서 대승했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죠.

황토재 전투는 농민군이 처음으로 지방 관군을 격파한 싸움이며, 이후 조정에서는 크게 당황하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삼아 경군을 내려 보냈는데 그 경군마저 4월 23일 장성 황룡강에서 패하고 말았으니, 경군대장 홍계훈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고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아버지 말씀이 장성 황룡작전 얘기를 허는디, 푸를 청자 썼다는 말은 않고 옷고름을 입에 물으라고 했다고 그러드만. 옷고름은 지금 가만 본께 옆에서 총맞으면 쓰러져 죽으니까 앞만 보고 진격허라는 전녹두의 전략인 것 같아. 옆에 쳐다보면 무섬끼 들어가지 고 앞으로 진격을 못하니까. 근디 나중에 들으니까 푸를 청자를 써서 탯머리를 허고 갔다고 그러는디 아버지 말씀은 옷고름을 물으라 했다 해요.

장성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정읍, 원평을 거쳐 4월 27일 전주성에 당당히 입성했다. 이때 농민군의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군대를 몰고온 홍계훈은 전주성에 먼저 들어간 농민군을 공격하여 이른바 전주성 공방전이 벌어졌고, 결국 5윌 7일 전주화약이 맺어져 농민군은 성을 내주고 퇴각하였다. 그때의 이야기를 고재호 노인은 아버지의 참전담을 바탕으로 생생히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근디 전주 작전 이 얘기를 아버님한테 들어보믄 그날 천 호가 타졌고, 관군들이 대완구를 가지고 와서 쏜 놈이 전주 남문에 맞어가지고 설주가 부러지는 것을 보셨다고 해요. 요새 같으면 소년으로 발이 빠른게 그랬던가 할아버지하고 선이 떨어져가지고 전주 남문에 올라가셨는데 그때 전녹두장군이 가운데 섰었대요. 우리 아버지는 오른쪽으로 섰고. 대완구 철완이 날아와 남문 설주에 맞었는디 저쪽에 섰던 사람은 즉사하고 거기서 전녹두장군이 다리를 부상당했다 이것이여. 그런디 동학군은 목에다가 명주수건을 두르고 다녔드만 근디 글로 피가 나오니까 착착 얽어매고 거기다 물을 찌끄르니까 요새 같으면 기부스가 된다 이것이여. 그런 얘기를 아버지헌티 들은 적이 있어요. 다치면 송화색 노란 수건으로 감고 허는데 요새 압박붕대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근디 대완구는 소리는 커도 위력은 없었던 모양이요. 그런데 설주에 맞아가지고 서끌이 도망가버렸다요. 그래가지고 전세가 어째서 불리했냐 하면, 연기가 동학군 있는 쪽으로만 불어왔다 이것이여. 근디 일진이 나가서 그냥 관군들 총으로 쏘아버리면 일자로 그냥 쪽 늘어서서 죽고 또 이진 나가서 죽고 삼진 나가서 죽고 그래서 거그서 실패해 가지고 황토재로 빠져나온 것 같아요. 아버님 말씀 들어보면.

이렇게 하여 1차 기병은 물론이고 2차 기병에도 참가한 고순택은 농민군 지도급 인물들이 차례로 체포될 때, 같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몇 차례 신문을 받은 후 1895년 3월 3일 재판을 받았다. 선고는 무죄방송이었고, 이에 긴장을 푼 고순택이 고향으로 내려오다가 정읍서 다시 체포되었다. 당시 이러한 경우는 흔하였는데, 지방 유림들과 유지들의 압력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복수심이 무수한 사람들을 살육의 현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아버지를 이뻐허신 것 같애. 그런데 서울서 공판을 받고 내려오셨는가 어쨌는가 몰라도, 정읍 들어섰는디 정읍서 붙들렸는디. 아버지는 소년이라고 그때 법으로도 내보내 주어서 집으로 오시고, 할아버지는 무장원한테 잡혀가서 고문도 당했겠지요. 그러고 나서 사자등, 지금 원림이라는 부락으로 가는데 무장원들의 사형장소가 있었습니다. 지나가면서 물어보면 거기 사람들은 다 알드만요. 그 사자등에서 그날 네 명이 총살을 당했는데, 셋은 살려달라고 그러고 우리 할아버지는 막 악쓰면서 너희놈들이 정치 잘못해가지고 우리가 바른 데로 헐라고 허다가 너희들에게 잡히게 되었어도 너희들 앞으로, 그런게 막 대항하시더라는 그런 얘기. 그때 사형장에 소년으로 막 놀러댕기는 애들이 있겄지요, 그런디 야동 축동허는디 가서 전씨 라고 그 냥반이 간게, 니 할아버지가 누구냐 해서 순자 택자라고 헌게 무[無]헌 줄 알았는데 손이 있구나 하면서 느그 한아씨 사형당할 때 내가 구경했다 그런 말씀을 허시더라니까요. 아버지 연령이나 되셨는데, 그 양반이 살아계셨으면 지금 백스무 살 자셨을까 그런 노인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고순택의 가족에게 날아들었고, 당시 부인이 허겁지겁 달려갔으나 상황은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선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했다.

난리 속이라 어디가 관을 짜올 수도 없고 헌게 그냥, 할머니가 대발쌈을 해 지게로 져다가 대를 드문드문 엮어. 대는 구하기가 쉽고, 그래가지고 할아버지를 닷새 만에 단장을 헐려고 갔는디 개가 허벅지를 뜯어먹었드라고 해요. 그때만 해도 개가 돌아다녔고 미친 개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할아버지를 이장을 했어.

지금이야 담담히 증언하고 있지만 그때는 이집 저집이 모두 그런 판이었으니 마을 전체가 생지옥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문노식 씨 그 냥반은 시체도 없이 집에서 나간 날을 제사로 지내지요. 송문수 그 냥반은 양자를 택해서 양자가 제사를 지내는데 송문수 외한아씬 목이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여. 목 없이 이장을 했어.

그 후의 생활이란 여느 후손들이 다 걸었던 노심초사,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마침 배운 기술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동학군 자식들은 나중에 또 잡어죽인다고 그렁게 당분간은, 인공 때 같으면 트[아지트]를 팠어. 광 쪽으로 해가 지고 구들 밑으로 트를 팠는데, 거기서 할머니가 손 무허면 안된다고 해가 지고 너는 여기서 자라고 허는데 그때 트 속에서 자니까 코고는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려서 못쓰겠더래요[웃음]. 습기가 차고 환기가 안되면 코고는 소리가 그렇게 크게 나는 모양이예요. 그것은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지요. 할머니가 과부가 되셔 가지고 무슨 기술을 가지셨냐하면 쪽물 기술을 가지셨지요. 쪽물이라는 게 옛날에 횟가루 넣고 염색하는 물이야. 쪽이 지금 나주에서 어디 한 군데 있다지 아마. 그러니까 우리집은 물방 할머니네 집이요. 그걸로 생계를 유지했어요. 쪽물로 물들이고, 동네 사람들 쪽물허는 집에 가서 물도 쳐준 게 말하자면 기술자지요 염색 기술자. 아버지까지도 할머니한테 배워 가지고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농사마지기나 짓 고해서 우리를 키웠지요. 아버지 할머니 중간까지 쪽물을 항에다 열 개고 몇 개고 넣고, 그놈을 여름에 물을 일어내가지고 다 일어나고 나면 거기다 횟가루 넣고서 쳐댄다 치면 거기서 새파란 물이 나오는데, 시집갈 양반들 이불 홑데기도 물들이고, 모시 같은 것을 물들이면 참 물이 곱고, 그 베가 겁나게 찔겨요. 중간까지도 그 물들인 이불이 있었는데 다 없애버렸어요.

그렇게 그럭저럭 살다가 세상이 어지러우면 ‘혹시 누가 해치지 않을까’ 놀란 토끼 가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는 것도 꺼릴 수밖에 없었는데, 한번 붙은 동학의 꼬리표는 현대사의 와중에서도 불온시 되어 후손에게는 하나의 족쇄처럼 작용하였음을 고재호의 증언을 통해 또다시 확인할 수 있다.

동학은 그 후로 의병난리가 났었는데, 의병 때는 우리집 같은 집은 연이어서 헐 사람이 없어져버렸지요. 나도 나이 먹고 충청도 계룡산에 간게 상제교라고, 김덕창이, 구암[龜菴, 김연국] 대법사 3세 교주라고 그럽디다. 거기 본교당에 가니까 칠판에다가 동학순도열사를 했더만요. 큰 묵판에다 파가지고 흰 글자로 해서 동학혁명이라고 않고 동학순도열사라고 했더만. 그 당시에 상제교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을 봤어요. 저는 여기서 육이오 전에 시끄러워져서 당숙이 거기가 살고 종형님도 거기 이사 가서 살고 해서 대밭에 가서 한 이년간 숨어 살았어요. 여기가 시끄러운게 좌익 우익 싸움 나가지고 여기 있다간 하마터면 죽게 생겼응게 그냥 교 믿으러 간다고 가버렸는데, 거기 가니까 상제교에서 제사도, 자손 한 명당 떡이면 떡, 곶감이면 곶감 한 가지씩만 해가지고 와도 여섯 간 대청에 떡만 해온 사람, 나물만 가지고 온 사람이야. 그리고는 그 앞에서 수십 명, 수십 명 넘어 좌우간 백 명 훨씬 넘게 거기와서 제 지내는 그 동학군. 그런디 가서 보니까. 그래가지고 저는 이년 만에 숨어있다가 나왔는디 본교당도 없어져 버리고 육해공군 거기가 지금 본부 안되야 부렀소. 지금 제한구역 되가지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 없어져버렸어. 거기서 상제교 현판을 본 일이 있는데 거기는 우리 할아버지가 창자 주자로 되어 있어요. 그것을 그대로 해서 상제교가 천도교 자기들 곁가지로 나가가지고 자기들 사대 교주, 구암 대법사가 아마 손병희하고 대등한 위친가 봅디다. 김연국이 그 다음에 덕창이여.

그래도 고재호 노인이 떠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굽히지 않고 할 말은 하고 살았던 강직한 분이었고, 그것이 못내 자랑스럽다.

인공 수복 당시 관군들이지, 요새 같으면 군인들 경찰들이 와서 우의 지시라고 불을 지른게 우리 아버지는 송장을 많이 듣고 넘어다닌 난리를 많이 겪은 양반이 분명해. 내가 들어 본게 야 이놈들아 모다 집에다 불질르고 댕겨가지고 타져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정치를 할려고 막 뭣이라고 그런게, 저놈의 영감 통 크다고 험서 갔는디 그놈들이 감서도 아버지를 안 죽였어.

이제 고재호 노인의 바람은 역적(?)으로 몰려 죽은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비석까지 세웠지만 그것만으로 원혼을 달랠 수 있으랴. 정부에서는 왜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후손으로서 내가 생각할 때 테레비에서 보면 아프리카 흑인들도 자기 뿌리를 찾는다고 고향에 가서 자기 집안 내력도 알아보고 그러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동방예의지국이고 백의민족이고, 단일민족이라고 허는디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쁜 짓이 아닌디 역사가 왜곡되어 가지고 한때나마 역적 비슷하게 되어 빛을 못 보고 살아계셨는데. 그러나 우리나라에 정말 사일구세, 광주항쟁이세, 오일륙이세, 모든 큰 사건을 보면 동학혁명의 의의가 그보다는 더 크지 않아요? 아무 무기도 없는 사람들이 결국에 농기구 가지고 창 들고 싸웠다는데 의의가 그 사람들 정신보다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요. 현 정부에서도 실은 운동권 학생들 잡아다 넣고 허는디 동학도 그와 비슷허게 볼테지라.

그러나 답답한 것은 정부의 처사뿐만 아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아버지한테 묻고 묻고 해서 기록이라도 해놓을 판인데, 결국에 그 당시 난리 얘기를,” 그동안 할아버지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이라도 해놓았더라면 이런 증언에도 속 시원히 말하고, 또 국가유공자 신청 때 증빙서류로 갖출 수도 있을 텐데…라고 이어졌을 말은 고재호 노인의 입에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게으름 탓인가 아니면 세상 탓인가. 고재호 노인의 눈에는 무한히 많은 말을 그대로 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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