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내정개혁의 선도자로서 이전부터 국내외의 촉망을 받은 대원군의 거동에 관해 근래 매우 수상한 이야기가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일찍부터 잘 알고 있는 바라고 믿는다. 이는 정부 부내에서 반대파 사람들이 대원군을 상처내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流言)을 흘림에 따라 사실무근이라는 점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괴문(怪聞) 가운에 역시 사실이라고 인정되는 것도 있다. 즉, 지난번에 어느 고관인 한인으로부터 은밀히 들은 바에 의하면, 근래에 대원군이 그 폭위를 휘둘러 은밀히 경성 내외에서 부호를 붙잡아 거액의 금전을 강제로 빼앗고 만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곧바로 이를 살육하고 지난번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금일에 이르기까지 이미 그 피해를 본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실상을 정찰하게 하였더니 과연 성안의 장초(長梢)라고 칭하는 곳에 거주하는 호상(豪商) 이덕류(李德留)라는 자는 당오전(當五錢) 70만 냥을 징수당하였고 또 성안의 주민 김중효(金重孝)라는 자의 아들 김영진(金英鎭)이라는 자는 13만 냥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또 남대문 안에 거주하는 김진엽(金鎭燁)이라는 자도 30만 냥을 상납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현재 투병 중이기 때문에 잠시 그 출금을 유예받았다. 이 밖에 또 경성 내외의 각지에서 출금을 명받은 자가 수많이 있다. 그 명령은 매우 준엄하고 비밀스러워 만일 출금의 명령을 받은 자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할 때는 곧바로 살육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일일이 상세하게 조사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들어 보니 대원군은 미리 그 막료에게 명해 은밀히 각 부호가(富豪家)의 재산고를 조사하게 해 순차적으로 그 심복들을 각 집안에 파견하여 그 재산고에 응당하는 돈을 내놓으라는 명령을 전하였다. 만일 그 명을 듣지 않을 때는 즉각 그를 구인(拘引)하여 감옥에 넣어 심하게 고문을 행하고 그리고 또 돈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때는 마침내 목을 졸라 죽인다고 한다. 1894년 10월 20일 경성(京城)에서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 대원군의 거동은 평양 함락 후 한때 표변한 모습이 있었지만 실은 지금도 석연하지 않은 점이 있는 상태로 때때로 기이한 태도를 보인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이번 달 14일 이다(井田) 해군 대군의(大軍醫)는 과거에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 씨를 치료한 사례로 그의 저택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때 대원군도 마침 그 저택에 돌아와 있어서 이다 군의에게 말하기를, “세간에서는 나의 손자가 동학당과 내통해서 비망(非望)을 기도하고 있다는 평판을 퍼뜨려 나의 사랑하는 손자를 죽이려고 도모하는 자가 있다. 그래서 나는 방관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엄중히 조사해서 처리하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장애를 받아 그 사실 여부를 세상에 밝힐 수 없었으니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 내가 경무청(警務廳)의 경부와 순사를 벌한 것은 외국의 예법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에는 500년 이래 선왕들께서 정해 놓으신 예법이 있는데도 국왕 폐하의 허가도 받지 않고 함부로 이를 변경해서 나에게 외국식 배례(拜禮)를 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의 처분을 부당하다고 하면 안 된다.”라고 하였답니다. 이 때 이다 군의가 일본군이 압록강 연안까지 진군해서 조선 경내에는 청나라 군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였더니 대원군은 아연실색하여 듣기 싫어하는 모양이었으며, “본래 이번 사건이 일어난 것은 동학당 때문이며 청나라는 우리나라의 청구에 따라 그 군대를 보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력으로 그 반란민을 진압할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나라의 수치라고 하겠지만 청나라에는 별다른 잘못이 없었다. 다만 청나라는 동학도를 진정시킨 후 오랫동안 철병시키지 않은 것이 하나의 과실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인데 귀국은 대군을 일으켜 이를 쫓아 버리기로 하였다. 그 이비곡직(理非曲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힘이 약하여 말할 위치에 있지 아니하므로 무어라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때 별실에는 두 사람의 외국 손님이 있었는데 샴페인 잔을 내놓고 정중한 대접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다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상인으로 물건을 팔기 위하여 온 사람들이라고 대답하고는 곧 안으로 들어갔고 이준용 씨가 대신 나와서 접대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 알아보았더니 그 외국 손님은 영국 총영사 힐리어 씨 외에 한 명(영국 서기생일 것이다)으로 그날은 그 영사가 면회하기 위해 일부러 출궁(出宮)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음 날 15일 밤 대원군의 집사 모[某, 과거에 대원군이 입궐하는 것에 관해 고쿠부(國分) 서기생과 자주 밀회하여 진력한 사람이다]가 몰래 고쿠부 서기생을 찾아와서 대원군 조손의 근황을 말하면서, “민씨가 집권한 2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대원군의 처지는 마치 감금된 죄수와 같은 처지여서 조금도 권력이 없었는데 오늘날 갑자기 극성(極盛)한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오로지 일본의 힘이었다. 그런데도 대원군은 근래에 일본의 큰 은혜를 완전히 망각한 것 같은 태도로 오히려 다른 외국인을 끌어들여 여러모로 일본의 의사에 상반되는 거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누이 간언을 드렸지만 대원군은 본래 매우 뱃심이 강해서 결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나 같은 사람이 점차 냉대를 받는 처지에 이르렀으니 통탄할 노릇이다.”라고 하였답니다. 또 지난 17일 본관이 오토리(大鳥) 공사를 대신해서 고별차 대원군을 방문했을 때 그는 반 농담삼아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나를 동학당의 수령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본래부터 완고하고 또 늙은 탓으로 개혁사업에는 부적당하다. 귀하는 기무처(機務處) 의원들과 협의해서 개혁을 적절히 시행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그 말투에는 왠지 모르게 불쾌감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대원군과 경무청 사이에 누차 충돌을 일으키게 된 사연을 물어보았더니, 지난번에 전 경무사(警務使) 이윤용(李允用) 씨의 관직을 박탈한 사건 외에도 여러 사정이 있는 모양으로 “지금부터 20여 년 전 대원군이 세도가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는 좌우(左右) 포도청을 이용하여 형살(刑殺)을 마음대로 해서 권위를 세웠었는데 이번 개혁에서는 대체로 양 포도청을 폐지하고 경무청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대원군은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하여 경무청 외에 구 포도청 포졸 80여 명을 남겨 두어 대원군에 사속(私屬)시켰습니다. 이에 경무청 쪽에서도 이를 반대하여 쌍방 간에 불쾌한 감정을 남기게 되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요사이 대원군이 남몰래 부유한 민간인의 재산을 거둬들인다고 하며 음력 8월 중 경성의 부호 김중효(金重孝)라는 자의 아들 모로부터 13만 냥(일본의 5,200엔)을 징수해서 이 중 3만 냥을 전기(前記) 구 포졸 80여 명에게 분배했고, 박여도(朴汝道)라는 자로부터는 5만 냥(일본의 2천 엔)을 징수했습니다. 다시 또 이달에 들어와서는 도박죄로 구류되어 있던 조정 인사 김동욱(金東旭)ㆍ김기영(金基永) 두 사람으로부터 각각 5만 냥씩을 징수하고 방면하였다는 비밀정보를 얻었습니다. 이 두 도박범을 체포하여 경무아문(警務衙門)에서 이들을 취조한 끝에 이들이 조정 인사들이므로 예규에 따라 법을 적용하여 그 처분을 국왕에게 상주하였던바 지금과 같은 정세하에서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전념하는 것이 필요하니 불문에 붙이는 것이 좋겠다는 지령이 내려 부득이 방면하였다고 법무협판(法務協辦)이 직접 말했습니다. 1894년 10월 20일 경성에서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