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이후 변함없이 나랏일을 관장하시느라 매우 바쁘실 것으로 멀리서 살피고 있습니다. 이노우에(井上) 백작도 어제 아침 요코하마(橫濱)를 출발하는 비각선(飛脚船)을 타고 고베(神戶)로 출발하였고 고베에서 육로로 그곳으로 가실 예정이므로 이 서한을 받아 보실 쯤에 친히 만나 보실 것입니다. 동 백작의 이번 분기(奮起)는 실로 후배 무네미쓰(宗光) 등으로 하여금 다시 흔모(欣慕)의 정을 증가시키는 점이 적지 않습니다. 국내외 다단한 때에 동 백작이 일시라도 국외에 부임하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선의 사건도 안목과 식견이 있고 능력이 있는 일대 정치가가 항상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감독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지 않으면 일시적인 치료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또 설령 일단 좋은 결과를 보더라도 갑자기 조선 조정 안의 군소의 내부 다툼 때문에 이전의 효과가 수포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울을 걸어 놓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이노우에 백작을 통해 처음부터 조선의 사무를 맡기지 않는다면 그것뿐이고 달리 비교가 될 만한 인물을 고를 수밖에 없겠지만, 동 백작에게 요청하여 중임을 맡게 하는 이상 어용 출장 등 가장된 운동은 오히려 그만두는 편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소생은 지금은 완전히 이노우에 백작과 같은 의견이므로 만일 동 백작의 의견이 행해지지 않을 때, 혹은 동 백작이 조선에 파견되더라도 정당한 외교관의 자격을 띠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된다면 소생도 다소간 의견을 토로하고 싶으므로 결정 전에 일단 소생을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내용을 확인차 말씀드립니다. 1. 따로 동봉한 오토리(大鳥)의 개인 편지가 지금 도착했으므로 사본을 제출합니다. 사이온지 (西園寺), 스에마쓰(末松) 등에 대해 다소 의심을 품고 변명적인 논의를 하고 있지만 조선 조 정의 내정을 논하는 부분은 내용이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오늘날 그곳에서 유럽의 어느 한 나라가 은밀히 조선 조정과 결탁하는 일이 있게 되면 우리나라에 매우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독하시기 바라면서 따로 동봉하여 보내드립니다. 1. 소생이 귀경한 뒤 각국 공사(독일을 제외하면 모레 면회할 예정)가 모두 내방하여 각기 조금 장시간 면담했습니다. 지금 별도로 말씀드릴 정도의 것은 없습니다만 모두 평양, 황해의 승 리로 인해 다소 감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단, 러시아 공사가 일조(日朝)동맹조약 은 전쟁 중으로 한정된 것이라는 질문은 다소 의미가 있을 것이고 또 이탈리아 공사(러시아 공사도 같은 말을 하였음)가 상해(上海) 중립을 권고한 것은 완전히 영국 정부가 이탈리아 정부에 의뢰한 일이 분명합니다. 또 ‘데훈손’과 면회를 했는데 그는 태국[暹羅]에 재임한다고 말했습니다. 제1차 면회 때는 이노우에 백작도 동석하였고 그는 단지 예절상의 내방에 지나 지 않지만 그 뒤 면회 때는 ‘사이암’의 사정을 들었습니다. 도저히 영국, 프랑스의 다툼은 피 할 수 없다는 것을 입 밖으로 드러냈습니다. 영국 정부도 각지의 영토 보호를 위해서는 매우 곤란한 모양으로 혹독하게 말한다면 입으로는 다툰다 하더라도 팔로는 다툴 수 없는 이른바 미대부도(尾大不掉)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위 보고를 아울러 드립니다. 부디 이노우에 백작은 일을 가능한 빨리 결정하시기 바라고 또 동 백작의 의견대로 가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다소간 변형이 필요할 경우에는 소생을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돈수(頓首). 10월 6일 무네미쓰(宗光) 슌포(春畝) 수상 각하 오토리(大鳥) 남작 사간(私簡) 배계(拜啓) 지난번 이후 여러 번 직접 만나셨다는 내용의 전보를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 조정의 동정은 여러 가지 사정이 혼잡하여 좀처럼 편지에 다 적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잠시라도 이임하는 것으로 된다면 훗날 만회할 수 없는 큰 우환을 야기할 것으로 끊임없이 고심하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날 화근을 끊고 훗날의 이원(利源)을 여는 것은 실로 대한(對韓)의 일대 모략(謀略)입니다. 노생(老生)의 대한정책 사안(私案) 1. 군국기무소 어쨌든 일본파, 즉 개화주의 사람들이 집합한 곳이다. 1. 대원군파 위권이 가장 중하다. 이들은 한 덩어리 완루(頑陋)한 무리로 도저히 개명의 길을 따를 수단이 없는 자이다. 1. 총리대신 기타 김굉집(金宏集),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 등이다. 이들은 실로 지금 조선인 가운데 쟁쟁한 자로서 그 성품이 독실하여 바람직한 무리이다. 이 나 라에서 이 이상 나올 인물이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말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들 무리에 대해 나는 어떠한 정책으로 이들을 상대할 것인지 말하면, 첫째, 대원군을 추대하여 엄히 그 폭위(暴威)를 제어하고 그 위권(威權) 휘두르지 못하게 한다(이 늙은이를 제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 늙은이가 사라지면 왕비당인 민족이 다시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둘째, 기무처 의원의 내정개혁설을 도와서 성과를 올리게 할 것. 셋째, 총리대신 등을 보좌하여 그 역량을 키우고 독립 독행하여 대정(大政)의 방향을 정하게 하고 조금도 다른 쪽은 견제를 받지 않도록 충분히 흑막(黑幕)의 권리를 갖출 것. 대원군은 폭위를 휘두르는 무식하고 완고한 늙은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권모에 뛰어나 이 나라에서 위권(威權)이 왕성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추대하여 간판으로 삼고 그 폭위를 압제하여(이것은 일본 공사를 제외하고 한 사람도 한마디를 할 수 없습니다) 적절하고 엄정한 충고를 하고 기무처 의원을 남몰래 비호하고 또 충실한 김굉집파를 유도하는 것 외에 달리 명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각하가 고심하는 점은 제가 대략 추측합니다. 스에마쓰(末松)는 천천히 순서를 따라 권고하고 이를 이끈다면 다소간 진보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토노(本野)는 내 처치를 우유부단하다고 말하고 강인한 수단이 필요하다고 칭할 것입니다. 사이온지(西園寺)도 다소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 단, 10일 또는 20일간의 체류로 이곳의 인정과 풍속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대한정책에 관해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적절히 담화를 한 적이 있지만 언제나 무심한 모습을 가장하고 진정한 실정을 명확히 알리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의 정책을 우원(迂遠)하다고 말하고 또는 필시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 크게 생각하는 바가 있어 주변 사람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고 더구나 순서를 좇아 목적을 달성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각하는 내 마음속을 충분히 통찰하고 있으므로 여러 사람의 이간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을 굳게 믿고 있지만 만일의 일을 걱정한 나머지 장문의 사신을 올리는 바입니다. 졸렬한 글로 생각을 다 전하지 못한 점 신중히 헤아려 주신다면 매우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만 돈수(頓首). 9월 29일 밤 9시 반 게이스케(圭介) 무쓰 무네미쓰 님 추계(追啓) 7월 23일의 사변, 이어서 아산전쟁 후 신정부의 조직도 상당히 이루어졌으므로 어느 정도까지 내정개혁이 연이어 행해질지 관망하고 있는데, 단지 장년배의 구두 논의만으로 논정(論定)한 것도 실행의 모양이 부족하다고 보입니다. 이에 스기무라(杉村) 등에게 말을 해 은밀히 보좌하게 했는데, 이것은 아무리 해도 단지 표면의 형태만이고 개신(改新)의 공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숙고해 보니 조선 조정의 사람, 특히 대원군 등은 평양의 승패를 의심하여 다분히 중국은 많은 군대를 갖고 있고 튼튼히 성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일본군이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함에 따라, 소생 등이 말하는 것도 마음속으로 신용하지 않는 것이 보여지므로 일부러 어떠한 것도 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양 일전의 결과 명백히 되었으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의 사무를 압박했지만 여전히 평양에서 일본군의 승리를 의심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방관들의 보고에 따라 마침내 일본군의 대첩이 사실임을 알고 그 뒤는 일본에 의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드러냈습니다. 조정의 인심도 일변하고 대원군 등도 갑자기 방문하고 수빙사(酬聘使)도 순식간에 변하여 여러 가지로 공사에게 호의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미 오늘도 국왕의 내알현(內謁見)이 있었고 대원군도 면회하여 여러 가지 그 전횡의 조치를 비난하였고 또 외무, 궁내 양 대신도 이리저리 기분을 살피기 위해 찾아와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날마다 책략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왕비와 대원군 사이는 도저히 화합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 위기에 몰려 파열될 걱정은 없으므로 별도로 병력을 사용해 한쪽을 돕고 한쪽을 물리칠 정도의 위난(危難)은 없습니다. 정책의 방침은 본서에 기술한 대로 대원군을 장식용으로 두고 그 폭위를 충분히 견제하고 정부(김굉집, 김윤식, 어윤중 등)의 사람 및 기무처 의원을 보익(輔翼)하는 것 외에 방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생각하시는 것도 있을 것이므로 이 두 통의 사신 및 전보문의 뜻을 헤아려 훈령하여 주시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위와 같은 바이므로 이때 소생의 이임(離任)은 실로 불이익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양찰(諒察) 바랍니다. 본서와 이 추계(追啓)를 숙독해 주신다면 별도로 서둘러 만난 뒤 정책을 결정할 정도의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만 돈수(頓首). 9월 30일 게이스케(圭介) 무쓰 님 동학당은 아직 진정될 움직임이 보이지 않지만 대원군의 의사 및 정부의 대일정책이 한번 변한 다음에는 특별한 병력이 필요 없고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건은 별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