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5월 23일 조보) 전교(傳敎)하기를, 호남에 출동한 병정들은 여러 날 동안 노숙하며 험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먹고살기가 어렵다는 한탄을 한 적이 없었다.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군문에 특별히 내탕전(內帑錢) 1만 냥을 하사하니, 초토사가 적당히 헤아려서 나누어 주도록 하라. ○정부가 난민을 위무(慰撫)하여 진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훈령을 발포하였다. 동학도가 영광에서 합세하였으므로 초토사가 비로소 경군을 인솔하고 영광으로 가서 큰 전투를 벌이려고 하는데 갑자기 윤음이 내렸다. 접전하기 전에 윤음을 반포하여 전라감사를 파직시키고 격식을 갖추어 전 고부군수 조병갑을 잡아들여 위무하는 뜻을 보였다. 그런데도 귀화하지 않으면 경군을 지휘하여 토멸하라. ○전운사(轉運司)를 공격한 이유 옥구의 군산과 영광의 법성포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도들이 함께 전운선(轉運船)을 공격하여 모두 쫓아냈으므로 전운(轉運)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번 소요의 근본 원인은 백성들에게서 일어난 것일 뿐만이 아니고 각 읍의 이서(吏胥)들도 전운하는 데 지쳤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전운을 폐지하려고 백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안팎에서 서로 호응한 것이다. ○초토사의 영(營) 안에서 관군 사망자 수를 통신한 것에 따르면 장위영(壯衛營)에서 온 서한을 보니, 그동안 토병(土兵, 감영병)의 사망자는 300여 명이며 경군의 사망자는 12명이라고 한다. ○초토사에 관한 비평 최근 전보의 내용에 전한 말을 들으니 그 대략에, 처음에는 접전하는 경군이 없었으므로 초토사는 군대를 머물게 한 채 출동하지 않고, 오직 토병을 앞세워 외부를 방어했기 때문에 토병과 경군이 서로 불평을 일으키자, 초토사는 자기 진영에서 무슨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조선에서는 지벌(地閥)과 인망이 있는 사람만 기용하는데 홍계훈은 본래 지벌과 인망이 없으므로 지금 그 수하의 병졸들은 비록 장수의 명령을 듣기는 해도 속으로는 그를 업신여겨 복종하지 않으니 이것이 큰 실책이라고 한다. ○최초에 전라도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파견하려 했는데, 동 사(使)는 병들었다는 핑계로 출발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찬배(竄配)에 처해졌음. 의정부 초기(草記)에, “명을 받들어 안핵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급한 일인데, 처음부터 병을 핑계로 즉시 떠나지 않아서 결국 이런 소란을 당해 경솔하게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안핵하는 일을 헛되이 지연시켰으니 누군들 허물치 않겠습니까? 사체(事體)로 보아 경책(警策)이 없을 수 없으니 고부군 안핵사 이용태에게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하소서.”라고 하자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음력 4월 15일(양력 5월 19일) 조보(朝報). ○속보에 의하면 고부군 안핵사 이용태를 의정부 초기에 따라 파직시킨 후 찬배하는 법을 시행하였다. ○영광 소요의 상황 영광군수가 법성포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배에 싣고 바다에 떠 있었으므로, 동학도들은 정당(政堂)과 공해(公廨)를 불태우고 그곳을 점령하였고,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빼앗겼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다. 신임 관료는 부임하지 못하고 전주로 가서 완영(完營, 전라감영)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지난 16일(양력 20일) 조보에 의하면, 전 영광군수 민영수(閔泳壽)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전임되었다. 그런데 먼저 온 보고에 의하면 도주한 각지의 지방관은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 군수 역시 도망자 중에 한 사람이면서 도리어 측근의 관직이 주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그는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비로소 이런 은전을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동학당의 상황 청산(충청도)에 있는 동학도들은 무장(茂長)으로 문장(文狀)을 보내기를, “지금 황해도와 평안도의 회답을 받아 보니 5회(晦, 5월 그믐날인가)에 접응한다고 하므로, 동남 제부(諸部)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회덕에 있는 제3대 두령 박(朴)이 파견한 정찰대가 청산영(靑山營)의 포교(捕校)들에게 붙잡혀 가지고 있던 문서자료를 모두 빼앗겼다고 하니 이 분통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부터 각 부대에 명령을 내려 다시는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일 전에는 비록 난처한 일이 있더라도 울분을 참고 성질도 내지 마시어 절대 함부로 동요하지 말고 이곳에 와서 지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학도들은 행객(行客)으로 가장하여 인천과 제물포 등지를 왕래하면서 전운사(轉運司)의 한 위원을 유인하여 배에 태우고 멀리 떠났습니다. 대체로 동학도들은 평소 전운사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멀리서 인천으로 와서 흉계를 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동학도들은 세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영광에 주둔하고 있고 한 부대는 무안에 주둔하고 있으며 한 부대는 함평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서로 합세하여 성원하고 있으며, 충청도에 있는 동학도들도 무리를 지어 호남지방(전라도)으로 많이 내려가 합세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