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메이지 27년 일청교전 종군일지 明治二十七年日淸交戰從軍日誌
일러두기

해설 본 사료, 「1894년(메이지27) 일청교전 종군일지(明治二十七年日清交戦従軍日誌)」는 후비 제19대대에 종군한 한 병졸, 상등병이 기록한 일지이다. 병졸은 도쿠시마현(徳島県) 아와군(阿波郡) 가키시마무라(柿島村, 현 요시노카와시(吉野川市))에 살고 있었다. 청일전쟁 중 제2차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조선에서 ‘동학당 토멸대대’(‘동학당 토벌대대’라고도 한다)에 종군하여 전장 현장을 기록한 것이다. 이 일지는 극히 일부분이 현지 지방지에 발표되었다. 고향에서 출발하는 부분과 조선에서 제2차 농민전쟁 최후의 격전, 장흥전쟁의 일부이다. 『이치바마치사(市場町史)』(町制四○周年記念出版, 市場町史編纂委員会編纂, 1996년 발행) 2단으로 편집되어 있는 903쪽 하단부터 904쪽 상단이다. 조사차 도쿠시마현 문서관에 들렀을 때 동 문서관의 도쿠노 다카시(徳野隆) 씨로부터 이 책에 관해 교시를 받았다. 이어서 현지 도쿠시마현의 향토사가 사카모토 겐이치(坂本憲一) 씨를 통해 일지 원문을 열람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일지에 기술된 개략을 소개한다. 필자인 병사는 1894년 7월 23일 소집 영장을 받고 후비 제19대대의 대대본부가 있는 마쓰야마시(松山市)로 간다. 대대는 최초에 시모노세키(下関) 수비대 배속을 명받고 8월 8일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시모노세키 포대 호위 등을 맡았다. 10월 28일 조선의 ‘동학당’이 재기하자 토벌대로 도한(渡韓) 명령을 받았다. 그 전날 히로시마대본영(広島大本営)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병참총감은 조선 수비대에 동학농민군에 대해 ‘모두 살육하라’는 섬멸 명령을 내렸다. 동학농민군 토벌의 전임 부대로 후비 제19대대가 조선으로 파견된 것이다. 후비 제19대대 제3중대는 1894년 11월 12일 서울의 용산을 출발했다. 이 부대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3로(路)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한다. 3로란 동로와 중로, 서로로 조선 중앙부에서 3개 중대가 동서로 펼치며 남하하여 동학농민군을 포위하고 서남쪽 전라도, 나아가 서남 구석으로 몰아 섬멸하는 작전이 취해졌다. 후비 제19대대가 서울을 출발할 때에 부여받은 훈령의 제1조에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초절(勦絶)’, 근절의 작전이 명시되었다. 조선에서 항일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갑오농민군이라고도 불린다. 제2차 동학농민전쟁도 제2차 갑오농민전쟁으로도 불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을 민주화의 출발점으로 보고 1980년대경부터 높이 평가되어 ‘동학농민혁명’으로 칭해지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로 알려진 ‘동학’이라는 민중사상(평등사상) 아래에 모인 동학 신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다. 조선 정부와 대지주 등 지역의 보수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던 동학의 지하조직[포접제(包接制)]의 대봉기가 기반이 되었다. 1894년 봄, 전라도의 전봉준이 지휘한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의 폐정개혁을 요구하며 조선 서남부 전라도에서 봉기하였고, 군(郡)의 경계를 넘어 전주부를 점령하고 농민전쟁으로 불리는 규모로 확장되어 갔다. 일본과 청국이 조선으로 들어가자 동학농민군은 외세 침입의 위기 앞에 일단 물러섰다. 이 전라도의 농민군은 남접(南接) 동학농민군으로 불린다. 그리고 한국의 동학농민군 연구자 박맹수 씨는 본지에 게재된 논문에서 당시 남접과 북접의 구별은 없었다고 새롭게 논하고 있어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에서는 종래의 통설에 따른다. 일본군은 조선으로 침입해 1894년 7월 23일 왕궁점령사건을 일으켜 왕궁을 계획적으로 무력 점령하고 국왕의 신병을 억류하고 정부를 교체시켰다. 또한 청일전쟁을 시작해 조선에 일본군의 군용 전신선을 가설하고 병참 도로를 조성했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군이 다시 항일봉기한 것이다. 일본군의 병참선은 조선의 서남부 부산이 있는 경상도를 북상해 조선의 중앙 산악지대에 있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도를 서북으로 가로질러 경기도에 있는 서울로 향했다. 동학의 본거지는 중앙 산악지대인 충청도 보은에 있어 이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의 동학농민군을 통설로는 북접 동학농민군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시대 이래 조선 해방 뒤에도 종래 북접 동학농민군은 항일봉기에 소극적이었다고 낮게 평가되어 왔다.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의 전후부터 일본군의 병참선이 통과하고 있던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등의 북접 동학농민군의 항일봉기가 발굴되어 사실(史實)의 수정과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동학농민군의 주력은 한국 서남부의 전라도의 세력, 이른바 남접으로 10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에는 서울을 향해 북상하는 봉기를 준비 중이었다. 최대의 전투가 되는 공주전쟁을 결의해 일본군과 싸우기 시작한 것은 공주전쟁의 전초전이었던 11월 21일부터이다. 이에 대해 북접 동학농민군은 10월 25일에는 소백산맥 일대에서 병참선의 일본군 수비대(후비 제10연대 제1대대)에 대해 일제 봉기하였다. 후비 제19대대와 싸우기 시작하는 것도 이 「종군일지(従軍日誌)」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듯이 가흥(可興)의 동막리(東幕里)에서로 남접보다 빠른 11월 17일부터였다. 후비 제19대대는 동로, 중로, 서로의 세 길로 나아갔다. 「종군일지」의 필자인 병사는 동로대 제1중대에 참여하여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에 소속했다. 제2분대의 인원수는 적혀 있지 않지만, 분대는 통상 15명에서 29명 정도이다. 이 분대에 종군한 한 병사의 시선으로 체험, 견문이 기술되어 있다. 이후 필자인 병사의 진군로는 해제의 「진로ㆍ숙박표」에 정리한 바와 같다. 제1중대, 동로대는 최초 경기도로부터 충청도로, 즉 서울로부터 동남 방면으로 진격했다. 출발 3일째에 이천에서 토벌을 실시하여 이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자식을 투옥하여 총살하고 촌락을 습격해 동학농민군 거점의 촌민을 총살했다. 이후 진군 도중에 동학농민군이 결집한 촌락을 습격하고 또 다른 조선 수비대가 습격해 촌락을 모두 태워 버린 현장을 목격하고 일지에 기록했다. 그 뒤 중로는 제3중대와 함께 보은 방면으로 진군했다. 대대장이 있는 본부대에 군자금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을 때 제3중대의 토벌 전쟁, 즉 문의(文義), 옥천(沃川)전쟁의 격전 직후의 전장을 목격하고 그 모습을 「종군일지」에 기록했다. 이어서 제1중대 본대로 돌아와 소백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경상도로 들어갔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가혹한 토벌을 경상도 각지에서도 실행하고 남부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다시 소백산맥의 남부를 서쪽으로 넘어가 전라도 운봉(雲峰)으로부터 남원으로 들어갔다. 남원에서 본부대 제3중대와 합류했다. 남원 이후 토벌은 고문, 총살, 소살(焼殺), 마을의 소각 등 더욱 격렬하게 실시되었다. 남서 해안에 있는 장흥에서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조직적 저항이 행해진 장흥전쟁이 벌어져, 필자인 병사가 참전한 전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장흥전쟁의 자세한 실상은 이 「종군일지」를 통해 처음으로 명확해졌다. 그 뒤도 고문, 총살, 소살 등이 기록된다. 해남에서의 처참한 처형은 본지의 별고(別稿)에서 소개했다. 전라도의 전통 있는 도시 나주에는 대대본부가 1개월간 체재하며 남서부의 토벌을 지휘하고 있었다. 나주에서 처형된 농민군이 산처럼 쌓여 방치된 모습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사료로는 일본 방위연구소가 소장한 청일전쟁의 사령부 측의 「진중일지(陣中日誌)」가 있고, 한국에서 간행된 『주한일본 공사관 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録)』의 공문서 및 그 책에 수록된 대대장이 조선 정부에 증언한 「동학당정토약기(東学党征討略記)」 등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들은 군의 공적인 사령부 기록이다. 이에 비해 여기서 소개하는 「종군일지」는 군의 공적 기록에서는 거의 기재되어 있지 않은 전장의 매우 처참한 실정이 기록되어 있다. 「종군일지」는 청서(淸書)된 일지이다. 「1901년[메이지(明治)34년] 1월 8일 대길일(大吉日)」 청서라고 두루마리의 심지(芯, 木製)에 적혀 있다.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의 현지를 조사했는데, 별고와 같이 일본과 한국 각지에서 성실한 협력을 받기도 하여 단순한 입증 조사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의 동학농민 토벌작전에 조선 전역에는 3개 대대가 중심이 되어 투입되었다. 본고에서 사료를 소개한 후비 제19대대(당시의 별칭, 동학당 토멸대대)와 후비 제10연대 제1대대, 후비 제6연대이다. 별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후비 제10연대 제1대대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북상한 일본군의 병참선 수비대로 동학농민군이 전신선 절단과 병참부 습격 등으로 저항한 데 대해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이 대대는 제5사단(본부는 히로시마[廣島]시) 소속으로 시코쿠(四国) 4현과 히로시마현(広島県)의 농민이 종군했다. 한편, 후비 제6연대는 처음에 조선 각지의 토벌에 파견되었고 이어서 서울로부터 북쪽의 황해도 등의 토벌에 참전했다. 제3사단(본부는 나고야[名古屋]시) 소속으로 도카이(東海), 호쿠리쿠(北陸)의 농민이 종군했다. 별고에서 주기(注記)하였듯이 특히 기후현(岐阜県) 출신 병사가 많은 점 등이 알려져 있다. 앞으로 학술조사의 과제이다. 본지의 별고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본 공사관과 공사관의 요청을 받은 일본군은 공식 명령을 반복적으로 보내 조선 각지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문서를 조직적으로 수색, 수집하여 일본 공사관으로 보냈다. 그 때문에 동학농민군 측의 자료는 그 대부분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러한 일본군 측의 한 병사가 토벌전쟁 현장을 적은 기록이 특히 귀중하다. 부기(付記) 학술적으로 귀중한 사료의 복각을 허락해 준 사료 소장자와 관계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부담스러운 측면을 지닌 사료임에도 이것을 복각하게 해 준 데 대해 특히 깊이 감사드린다. 도쿠시마현(徳島県) 문서관의 도쿠노 다카시 씨, 도쿠시마현 총포도검 심사위원인 사카모토 겐이치 씨에게는 사료와 도쿠시마 현지의 역사 등에 관해 여러 가지 교시와 원조를 받았다. (이노우에 가쓰오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 정리)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