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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3장 난리를 만나 은둔하다[第三章 遭難隱遁]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65년 01월 00일
일러두기

을축년(1865년) 정월에 처자를 거느리고 울진군(蔚珍郡) 죽병리(竹屛里)로 옮겨가서 살았다. 그 무렵 제세주의 권솔을 모시고 와서 한 곳에서 살았다. 그 때 제세주의 아들 세정(世貞)과 세청(世淸)이 나이가 모두 어려서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가 어려웠으므로 대신사는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제세주의 부인을 뵈올 때마다 친 어머니와 같이 모셨으며 무릇 말할 때나 수발을 들 적에는 늘 “큰댁”이라고 일컬었다.
병인년(1866년)에 기찰(譏察, 죄인을 찾아다님)해서 잡으려 다니는 자들이 곳곳에 널렸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많아졌다. 대신사가 드디어 영양군(英陽郡) 용화동(龍化洞)으로 옮겨가서 행적을 숨기고 영영 산을 나오지 않으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3월 10일. 곧 제세주가 난을 만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신사가 상주(尙州)의 교인인 황문규(黃文奎), 한진우(韓振祐), 황여장(黃汝章), 전문여(全文汝) 등과 경건하게 예식을 차렸다.
7월. 제세주의 부인이 아들과 딸을 거느리고 뒤따라 왔다. 대신사가 자신의 집을 바쳐 그들을 살게 하고는 자신은 곧바로 다른 가옥에 가서 더부살이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새끼를 꼬아서 겨우겨우 살아갔다. 그러면서 지성으로 주문을 외우면서 여유있게 자득(自得)의 모습을 보이며 조금도 거리끼거나 우울한 기색이 없었다.
8월. 미국의 군함이 강화도(江華島)에 침입해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각지의 교인들이 대신사가 계신 곳을 찾았으나 끝내 만날 수가 없었다.
10월 28일. 제세주의 강생일이었는데 다례(荼禮)를 거행할 때에 문제(門弟)인 강수[姜洙, 호는 하산(河山)이다] 박춘서(朴春瑞)가 와서 참석했다. 대신사가 제세주의 생신과 제삿날에 각각 돈 40문을 갹출하여, 다례(荼禮)와 향사(享祀)의 제수를 삼기위해 수계첩(修稧帖)을 제의하고 각 포(包)에 널리 알렸다.
정묘년(1867년) 봄 2월. 대신사는 다시 가족을 이끌고 예천군(醴泉郡) 수산리(水山里)에 옮겨가서 살고, 제세주 부인은 상주(尙州) 동관암(東關巖)으로 보내드렸다. 이것은 그 무렵 뒤를 쫓는 자들이 많아서 그와 연루(連累)됨을 면하려는 것이었다.
무진년(1868년) 봄 3월. 영양군(英陽郡) 일월산(日月山) 죽현(竹峴)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기사년(1869년) 봄 2월. 양양군(襄陽郡)의 교인인 김희경(金喜慶), 김경서(金慶瑞)가 찾아와 뵙고 수도(修道)의 절차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그 연원(淵源)을 묻자 대답하기를 “공씨(孔氏) 성을 가진 사람에게 교를 받았습니다. 그 연원은 알지 못하고 주문 열 석자만 외울 뿐입니다”라고 했다. 대신사가 그들을 위해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주니 두 사람이 크게 기뻐해 자기들이 모시기를 청했다. 3월에 대신사가 드디어 박춘서(朴春瑞)와 함께 길을 나서서 양양군 최가 김가의 집에 이르니 모두 공경과 예절을 다해 모셨다. 부근에서 입교한 자가 30여 집이었다.

주석
일월산 아래 마을. 현재도 이곳에는 유적이 남아 있다.
1866년에는 미국이 아닌 프랑스가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수계첩(修稧帖) 돈을 모아 계를 조직하고 정기로 제사 경비를 조달케 한 명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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