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대신사(海月大神師)는 곧 시천교(侍天敎) 제2세 교조이다. 제세주(濟世主) 강생(降生) 4년, 인효천황(仁孝天皇) 10년
대신사의 성은 최(崔) 씨요, 휘(諱)는 시형(時亨)이요
스물여덟 살에 본군[경주]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에 살았는데 이웃 사람들이 모두들 행동이 바르다고 하면서 마을의 집강(執綱)을 맡겼다. 무릇 도박과 잡기를 금지시키고 싸움질을 말리며 바른 길로 어루만지고 이끄니 여러 사람들이 추대하여 이 일을 맡긴 것이다. 서른세 살에 온 가족을 이끌고 검곡(劒谷)으로 이사를 했으며
신유년(1861년) 11월. 대신사는 오로지 돈독하게 배우는데 뜻을 두고 깊이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쏟았으며 오묘한 도리를 깨달아 먼 뜻을 길러서, 깊은 깨달음이 많이 있었다. 일찍이 스스로 마음에 다짐하기를 “일찍 독공(篤工, 학업에 독실한 사람)한 사람이 하늘의 말을 받든다는 풍문을 들었는데, 나 홀로 이런 징험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성의가 부족한 소치이다. 성의는 나에게 있는 것이니 내가 마땅히 나에게 있는 것을 다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밤이 깊어 사람들이 고요할 때를 타서 문밖 대나무 숲 아래에 있는 연못에 가서 목욕을 했다. 처음에는 얼음을 깨고 들어가자 차가움이 뼈 속을 파고드는 것과 같았다. 하루도 빼지 않고 재계를 했더니 한 달 남짓 지나자 그 찬물이 점점 따뜻한 샘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공중에서 들려오는 말이 있었는데 “따뜻한 몸을 해치게 된 것은 차가운 샘물에 급히 들어가 앉은 탓이다”라고 하였다. 비로소 하늘의 신령이 가르친 바라고 여기고 목욕을 그쳤다.
다음해 임술년(1862년) 정월에 대신사가 하늘을 생각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등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다. 등잔 기름이 반종재기 밖에 남지 않았지만 삼칠(三七)의 밤을 새웠는데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영덕(盈德) 사람 이경중(李敬仲)이 기름 한 병을 보내주자, 이날 밤 남은 반종재기의 기름이 갑자기 깡그리 없어져 버렸다.
3월. 대신사가 마음속으로, 제세주가 호남(湖南)에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가정리(柯亭里)로 가서 제세주의 조카인 세조(世祚)에게 물어보니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대로 경주부에 가서 또 이무중(李武仲)에게 물어보니 그도 또한 세조처럼 모른다고 대답했다. 마음이 매우 의아스러워서 길가에서 묵념을 해보니 제세주가 분명히 고을의 서쪽 박대여 집에 있었다. 곧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제세주가 주문 외우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매우 기뻐서 나아가 뵈웠다.
6월. 대신사는 포덕하려는 의지가 있었지만 밑천이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본군(경주)에 살고 있는 벗인 김이서(金伊瑞)가 벼 120 포대를 보내 주었다. 그러자 주변 고을인 영해(寧海)・영덕(盈德)・상주(尙州)・흥해(興海)・예천(醴泉)・청도(淸道)의 훌륭한 선비들이 옷을 떨치며 다투어 와서, 날로 강도(講道)와 포덕에 종사했다. 이때부터 검악(劒岳, 최시형이 살던 곳을 빌어 별칭으로 썼다) 포덕이란 말이 비로소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그래서 뚜렷이 둘째 어른 자리를 차지했다. 대신사가 일찍이 밤에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었는데 지혜의 빛이 저절로 방출되어, 마복동의 도둑 아이가 벽을 뚫고 금붙이를 훔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더니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
10월. 관아의 종들 30여 명이 관아의 명령으로 잡아오란다고 하면서 포악한 짓을 멋대로 했다. 대신사가 묵묵히 한참 생각하다가 거짓 핑계를 대고 있음을 알고 삼베 30줄을 가지고 관노들을 얽고 묶었는데 어린애들 다루 듯 쉽게 해치웠다. 여러 관노들이 두려워서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비니 마침내 풀어주면서 타일러 보냈다. 그래서 마을에 “검곡에 최장사가 있다”라고 소문이 났다. 이로부터 교도들은 더욱 그의 이적을 기이하게 여겼고 신앙하는 이들이 매우 많이 몰려들었다.
계해년(1863년)에 대신사가 제세주의 분부를 받들어 먼저 영덕, 영해 등지에 가서 포덕을 하며 여러 교도들과 진리를 강연할 때에 박춘언(朴春彦)이 강령(降靈)을 받으면서 옷을 벗어던지는 행동을 했는데 마침내 대신사에게 돌아와 복종하는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