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9월. 경주부에 윤선달(尹先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래부터 음험하고 간휼한 자였는데 은밀하게 경주부의 영장(營將)의 눈치를 보다가 말하기를 “이 고을에 최선생이란 자가 있다. 그의 도제(徒弟)가 수천 명이다. 만약 정도에 어긋나는 학문을 한다고 지목해서 잡아들여 차꼬를 지워 감옥에 가둔다면, 그 도제들이 틀림없이 많은 뇌물을 써서 풀어달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장이 이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하여 포교를 보내 잡아들였다. 그 때가 9월 29일이었다. 제세주가 태연하게 의관을 갖추고 도제 10여 명의 수행 하에 북천(北川)의 나루터에 다다랐다. 동쪽 강변서 빨래하던 여인 백여 명이 한꺼번에 일어나 해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한 줄기 서기가 무지개처럼 뻗어 내려오더니 하늘과 땅을 비추면서 옹호하듯 내려왔다. 이에 그들이 제세주를 향하여 절을 하였다. 예전 복희씨가 괘를 그렸을 때에 후토부인(后土夫人)이 와서 보았고, 가담(迦曇)이 게송 겨울 11월 9일. 제세주가 대신사와 함께 흥해군(興海君) 송곡(松谷)에 있는 손봉조(孫鳳祖)의 집으로 가르치는 자리를 옮기자, 문도들이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제세주가 동자 몇 명을 불러들여 글 쓰는 법을 읽히도록 하였는데, 밤새도록 연습해도 한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다만 개발새발 그렸을 뿐이다. 이에 묵념하면서 마음으로 주문을 건 끝에 하늘이 내린 말씀을 받아 이르되 “너희들은 잠시 멈추도록 하라. 필체를 내려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세주가 천주를 모시고(侍天主) 연귀(聯句)를 주고 받았다. 천주(天主)가 선창하기를 “방방곡곡행행진(方方谷谷行行盡)”이라 하자, 제세주는 “수수산산개개지(水水山山箇箇知)”
제세주가 신문을 받아야 하는 관아의 뜰로 들어가니 영장이 물었다. “너는 향곡의 한 낱 빈한한 선비로, 무슨 도덕이 있다고 무리가 수 천 명에 이르느냐? 이는 너가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한 결과일 것이다. 또 너가 사람들을 현혹하는 탓으로 병을 고치는 무당들과 점쟁이들이 모조리 생업을 잃게 되었으니 이 무슨 환술이냐?”라고 하였다. 제세주가 정색을 하고 한창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대답하였다. “하늘의 명을 성(性)이라 이르고 도 닦는 것을 교(敎)라고 말한다. 이것으로써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무엇이 옳지 못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제세주의 안광이 번쩍거리면서 빛이나서, 마치 번개가 곧바로 감영의 대청을 쏘는 듯하였다. 영장이 자신도 모르게 실색을 하였다. 또 제세주의 말하는 기운이 늠름하고 엄숙함을 보고는 곧바로 마루에서 내려와 제세주를 위로하고 사죄하면서 놓아주었다.
제세주가 관아에서 물러나와 집에 머물고 있으니 약속도 없이 모인 문도들이 7백여 명이었다. 제세주를 무고했던 윤선달은 두려워서 도망쳤다. 영장이 여러 번 주의 숙소로 와서 지난 잘못을 사죄했다. 마침 경주부윤(慶州府尹)의 아내가 급병에 걸려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부윤이 예방 아전을 제세주에게 보내 그 사실을 알리고 간절하게 영부를 구했다. 제세주가 잠시 묵념하다가 예방 아전을 위로해 보내면서 “네 부윤 내아(內衙, 아내)의 병세는 이미 쾌차했다”라고 말했다. 아전이 돌아와 이 사실을 부윤에게 알리니 병이 과연 깨끗이 나았다. 경주부 사람들이 모두 경복했다.
겨울 10월 5일. 제세주가 용담정사(龍潭精舍)로 돌아와 통문을 보이어 여러 문도를 깨우쳤다.
제세주가 깊은 밤에 글을 읽고 주문을 염송할 적에 문도가 들어와서 말하였다. “오늘 밤 온 하늘에 서기(瑞氣)가 나타났는데 영롱한 빛을 내는 속에 한 부인이 구름을 타고 머리에 쪽을 지어 얇은 옷을 입고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나무 끝에 단정하게 앉아 있습니다. 아마도 구천(九川)의 현녀(玄女)가 제세주의 글 읽는 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세주가 “너는 아느냐? 현녀가 나무 끝에 있느냐, 너의 마음속에 있느냐?”라고 하니 문도가 응답하지 못하였다. 창문을 열고 보니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모두 공중의 꽃이 되었다.
12월. 제세주가 친히 각 곳의 접주(接主)들을 정했다.
계해년(1863년) 설날에 제세주가 천주(天主)가 내린 비결을 받들었는데, 거기에 “도를 물으니 오늘날 무엇을 알리오, 뜻이 신원(설날)인 계해년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제세주가 대신사를 영덕(盈德) 등지에 보내 오직 포덕(布德)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대신사가 교인들과 함께 도를 강할 때 박춘언(朴春彦)이, “강령(降靈)이 내리고 내리지 않음은 오직 뜻한 바에 달려있다”라고 말하자, 대신사가 이르되 “어찌 그러리오? 비록 목석이라도 강령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랴!”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드디어 강령주문을 염송하자 춘언이 곧 신령을 받았으며 대신사가 주문을 연달아 염송하자 춘언이 옷을 벗어 던지고 뛰어오르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참회하고 심복하는 속마음이 있는 듯했다.
이해 봄 3월. 제세주가 둘째 아들 세청(世淸)과 김춘발(金春發), 성일규(成一圭), 하한룡(河漢龍), 강규(姜奎) 등 여러 사람들에게 서법(書法)을 가르치고 익히게 했는데,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오묘하기가 입신(入神)의 경지여서 난새가 떠다니고 봉(鳳) 새가 깃든 듯했으며 천리마가 달리고, 사자가 할퀴는 듯했다. 무릇 제세주가 신령스런 글씨 궁을(弓乙)이란 전서를 뜻대로 들떠 있을 즈음에 거처하던 곳인 용담정사의 대들보가 번쩍 들리고 흔들거리고 돌며 구르기를 오래 하다가 그쳤었다. 비록 아이들의 글자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되는 것 일지라도 명을 받고 주앞에서 쓰면 그 자 획 모양이 제세주가 쓰신 것과 터럭만큼도 차이가 없었다. 들은 사람들이 더욱 신기해서 다투어 와서 배웠다. 제세주가 드디어 필법(筆法) 한장을 지었다.
6월. 제세주가 특별히 편액을 써서 각처의 문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7월에 접소(接所)를 열었는데 그때 50여 명이 모여 들었다. 제세주가 시 한 구를 지었는데,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고 구악(龜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