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년(1862년) 3월. 제세주가 전 경주부 현서면(顯西面)에 돌아와 백사길(白士吉)의 집에 행차하였다. 최중희를 시켜 집에 편지를 전하게 했으며 아울러 「도수사」와 「논학문」을 싸서 보냈다. 이어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몰래 거처하면서 그 문도들 중에 영감이 먼저 온 자들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각처의 교도들은 제세주가 아직 호남에 있다고 생각하고 문후하지 않았다. 오직 대신사만이 먼저 이르렀을 뿐이었다. 제세주가 묻기를 “어떻게 해서 알고 왔느냐?”라고 물으니 대신사가 대답하였다. “심령이 느낀 바 있어 곧바로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했다. 제세주가 웃으면서 “성신(誠信)이 이르는 곳에는 그 응대함이 이와 같다. 다가올 온갖 일이 한 이치로 돌아간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사가 물었다. “소자의 성심이 부족해 도의 진리를 아직도 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겨울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재계 목욕하며 치성을 드리기 위해 깊은 밤에 얼음이 언 샘물에 들어갔더니, 얼었던 샘물이 저절로 따뜻해졌습니다. 등잔 기름 반종재기로 21밤이나 지냈는데도, 기름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이게 무슨 이치였습니까?”라고 하였다. 제세주는 “천주 조화는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그대의 정성이 어떤 지를 시험하고서, 조화의 현기(玄機)를 보인 것이다. 그대는 반드시 스스로의 몸을 사랑하고 현기를 잃지 말고 오직 포덕 광제(廣濟)에 힘쓰고 힘쓰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와서 제세주를 뵈온 뒤부터 날마다 사방의 선비들이 옷을 떨치면서 문하에 들어와, 제세주는 이들을 접대할 겨를이 없을 지경이었다. 또 제세주의 논의가 고상하고 밝아 신령의 조응함이 보통 때와는 달랐다. 그때 사람들이 많이들 그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에 제세주가 통유문을 지어, 각기 생업을 안정시키고 편안히 살면서 도를 닦는 데에 힘쓰라고 일렀다.
같은 해 6월. 「수덕문(修德文)」, 「권학가(勸學歌)」, 「도덕가(道德歌)」를 완성하였다.
가을 7월. 제세주가 현서(顯西)에 있는 강원보(姜元甫) 집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의 일이다. 회곡(回谷) 큰 방죽에 이르자 말이 갑자기 놀라 땀을 흘리면서 나가지 않았는데 잠깐 사이에 갑자기 방죽의 7~8장(丈) 정도가 무너져 내렸다. 그 소리가 큰 우레와 같았다. 언듯 살펴보니 한 줄기 햇빛이 사람과 말을 옹호하고 있었는데 편안함이 평지와 같았다. 제세주를 따르던 자들도 주를 모시고 모두 안전하게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 제세주가 또 서산(西山) 내에 있는 박대여의 집을 방문했다가 돌아왔다. 이날 밤 비가 많이 와서 거천(巨川,) (경주부 서천)이 불어 몇 장(丈) 남짓이나 넘쳤지만 제세주가 말을 채찍질하며 건너가니 물이 제세주의 무릎에도 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려고 다투어 몰려 들었는데, 큰 이무기가 가로로 수면에 걸쳐있었으며, 그 등이 마치 판자다리와 같았다. 제세주가 지나가자 이무기가 유유히 사라졌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제세주가 천신이 조화를 부리는 게 불가사의하다고 일렀으며, 신앙자가 날로 갈수록 더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