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대신사의 집지[第五章 大神師執贄]
같은해 10월 그믐. 제세주가 친영을 성묘할 때 마침 폭우가 쏟아졌다. 가인(家人)들이 모두가 입을 모아 그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제세주는 “천주가 명을 내렸으니 저절로 그치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세조(世祚)의 집에서 말을 빌려 타고 20리를 갔다가 돌아오는데 큰 비가 오는 속에서도 한 줄기 햇빛이 사람과 말을 둘러싸서 무엇 하나 젖지 않았다. 세조가 이 모습을 신기하게 여기고, 비로소 제세주의 가르침을 받들고 수도했다. 이듬해 신유년(1861년) 봄에 사방의 현사들이 풍문을 듣고 왔는데 다 시중드는 사람들을 모두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혹은 감화를 받아 입도하기도 하고, 혹은 포덕에 힘쓰기도 했다. 드디어 「포덕문」과 「몽중가(夢中歌)」를 지었다.
같은 해 6월. 해월(海月) 대신사(大神師)가, 제세주가 무극대도(無極大道)로 세상 사람을 창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집지하며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대신사는 성이 최씨요, 휘는 시형(時亨)이요 자는 경오(敬悟)요 호는 해월(海月)인데 제세주의 먼 친족이다. 그 때에 경주 검곡에 살았는데 비로소 제세주의 문하에 명함을 드리고 뵈었다. 대신사는 천자(天姿)가 고상하고 후덕하였으며 훌륭한 풍채가 빼어나서 한번 보아도 그 법기(法器)됨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제세주가 그를 적통으로 삼아 교통(敎統)을 잇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대신사가 제2세 교조(敎祖)가 되었다.
제세주가 대신사에게 이르기를, “우리 도는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는 이치를 받아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것이다. 하늘 섬기길 부모 섬기듯이 할 것이며 사람 섬기길 또 한 하늘 섬기듯이 하라”고 하였다.
제세주가 성경신(誠敬信)를 도를 세우는 본체로 삼아, 수심정기(守心正氣)로 도를 닦는 요체로 삼고, 덕을 펴 광제창생(廣濟蒼生)함을 도를 행하는 용(用)으로 삼았다. 도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서학(西學)에 대항하였다는 점 때문에 굳이 동학(動學)이라고 이름지었다.
여러 과목을 정해놓고 입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준행케 하였다. 제1은 청수(淸水)로 정성을 바칠 것이며, 제2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을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고할 것이며, 제3은 출입할 때 하늘에 고하되 일용과 동작 그리고 말한 것 까지도 모두 고해야 한다. 이것이 수도의 첫 길이다.
어느 날, 제세주가 남쪽으로 여행할 뜻이 있었는데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요즘에 우리 도를 포교하는 자들이 야비해서 아름답지 못하니 그 누가 그 근원을 찾아 그러한 추세를 선양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드디어 최중희(崔仲羲)와 함께 호남(湖南)의 남원(南原)에 이르러 서공서(徐公瑞)의 집에서 10여일 정도 휴식을 가졌다. 거처를 옮겨 은적암(隱寂菴)에 이르렀는데, 이때 만산(萬山)의 깊은 곳에 대중이 몰려들자 감로(甘露)의 법문(法文)을 열고 깊은 교지를 들어냈으며 금강(金剛)의 보좌에 근거해 참된 뜻을 밝혔다. 석가세존이 쌍수(雙樹)에서 시적(示寂)하신 몸을 뚜렷이 다시 드러냈으며, 제세주는 전율하면서 너무 기뻐하였다. 한 요사에서 거처하면서 깊은 밤 잠을 드니, 모든 인연이 갑자기 끊어지고 만 가지 소리가 모두 안정되어, 신령이 마치 감응한 듯했다. 드디어 점서를 붙들어서 「도수사(道修詞)」와 「논학문(論學文)」을 지어 영탄 (咏歎)의 뜻에 부쳤다.
주석
시천교에서는 2세 교주 최시형을 대신사(大神師)라 호칭하는 데 반해 천도교에서 최제우를 대신사(大神師), 최시형을 신사(神師), 손병희를 성사(聖師)라 호칭한다. 집지(執贄)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스승에게 예물을 바치고 제자되기를 원하는 의식이다.
최시형의 본명은 경상인데 최제우의 제자가 된 뒤 해월의 호를 받았고 뒤에 시(時) 자 돌림을 만들어 시형으로 고쳤다.
「주역」 계사에 나오는 무왕불복지리(無往不復之理)에서 인용한 말. 순환논리를 말한 것이다.
심고(心告)라 부르는 수행법. 청수는 정성으로 비는 것, 밥을 먹을 때마다 식고(食告), 출입할 때마다 고천(告天) 또는 부모에게 알리는 출입고를 수도의 기본을 삼았다.
감로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로 불타의 교법이 중생을 잘 제도함을 비유한다.
시적(示寂)
보살이나 고승의 죽음을 의미함. 여기에서는 석가가 入寂한 것을 말한다.
『도원기서』에 따르면, 「도수사」는 최제우가 1861년 12월 무렵 남원에 있을 때 수도의 방법을 적은 내용이다. 「논학문」은 동학의 호칭과 동학의 요지를 말한 내용으로 「동학론」이라 부르기도 한다.